황진이 시조 중에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로 시작하는 작품이 있다.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네’라는 길재의 시조에서 다시 산천(山川)의 차이를 밝힌 구절이다. 같은 자연이라도 산은 제자리를 지킬지언정 물은 흐르는 존재이기에 과거의 물과 현재의 물이 같지 않음을 갈파한 것이다. 산천을 묶어서 보느냐 나눠서 보느냐 차이는 있지만 두 시조는 모두 쉽게 변하는 인심(人心)의 부박함을 노래했다.
재일교포 가수 조박 씨가 지난해 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발표한 ‘백년절’이라는 노래엔 이를 무색하게 하는 대목이 있다. ‘백 년 지나면 강산이 변하네/대지는 갈라지고 끊겨 버리고/대대손손 삼대가 살아왔건만/조국을 갈망하는 허무함이여/백 년 지나면 강산이 변하네/사람의 마음도 변하지만/백 년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은/굽히지 않는 불복종.’
이 노래는 100년이란 세월 동안 애달픈 타향살이를 하면서도 일본에 귀화하지 않는 70만 재일교포의 독특한 정체성에 주목한다. 산천이 바뀌고도 남을 세월에도 변치 않는 그 비타협적 정신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한국 민요조 멜로디에 기초한 백년절에는 일본의 엔카와 한국의 트로트, 남한의 운동권 가요(아침이슬)와 북한의 행진곡(김일성 장군의 노래)이 뒤섞여서 난장을 펼친다. 처음엔 어색하게 느껴지던 이 기묘한 유행가 조합이 재일교포의 신산한 삶을 풍자적으로 녹여낸 가사의 힘으로 흥겹고도 신나는 댄스곡 메들리가 되어버린다.
‘백 년, 바람의 동료들’은 그 노래의 사연을 음악극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무대는 오사카의 코리아타운으로 유명한 이카이노 거리의 술집 ‘바람 따라 사람 따라’. 개업 20주년을 맞은 이곳에 대대손손 일본인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니고 (북)조선인도 아닌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들은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를 붙잡고 살아왔던 인생살이를 돌아가며 들려준다.
제주 4·3사건으로 너무도 많은 친인척을 잃어 집집마다 1년에 10여 차례나 제사를 지내는 피눈물 나는 사연, 북송선을 타고 간 가족과의 생이별로 시커멓게 가슴 탄 사연, 한국 민주화에 동참한다는 자부심이 ‘한국말도 못하는 반쪽발이’라는 말에 무참히 짓밟힌 사연….
타향살이의 설움을 달랠 소속감을 찾으려 좌충우돌하던 그들이 내린 결론은 “내셔널리즘도 싫어, 코즈모폴리터니즘도 싫어. 민족적 편견 섞인 조센징도 싫지만 버터냄새 나는 ‘자이니치 코리안’도 싫어. 그저 활기 넘치는 재일 간사이 사람으로 살래”이다.
그들은 흑백논리의 이분법을 타파하는 제3의 존재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규정한다. 그 순간 일본에 대한 불복종과 남북 모두에 대한 반항심이라는 부정의 에너지가 ‘민족 국적 피부색 인종 다 상관없는 일본 빈민 공화국, 이카이노 만세’라는 긍정의 에너지로 폭발한다. ‘눈처럼 쌓이고 술처럼 빚어지는’ 한국적 한(恨)이 국적을 초월한 신바람으로 전환하는 순간이다.
조박 씨가 희곡을 쓰고 일본 신주쿠양산박극단을 이끄는 김수진 씨가 연출한 이 작품은 지금까지 소개된 재일교포 연극 중에서 가장 박력이 넘치면서도 흥겹다. 통속적인 유행가 가사를 읊으면서도 눈물과 웃음이 범벅된 구수한 맛을 잃지 않고, 차별 학살 분단 독재 통일 등 민감한 내용을 다루면서도 곰삭은 맛을 낼 줄 안다. 직접 출연해 연기와 노래를 펼치는 조박 씨와 한국인 배우들 역시 어느 하나 튀지 않으면서도 각기 제맛을 잃지 않는 양념 맛을 제대로 낸다. 엔카와 트로트에 얽힌 가요사 비화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i:두산아트센터의 올해 기획공연 ‘경계인’ 시리즈 두 번째 작품. 7월 2일까지 서울 종로구 연지동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 111. 1만5000∼3만 원. 02-708-5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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