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안 이씨 외암 이간(1677∼1737)의 6세 직손인 이상익(1848∼1897)이 살던 고택. 충남 아산시의 외암민속마을에 있다. 글항아리 제공
《“조선의 역사 연구는 가문의 족보를 아는 데서 시작됩니다.” 조선시대에는 가통(家統), 학통(學統), 대통(大統)이라는 세 개의 통치권력이 존재했다. 학통이 학문 권력을, 대통이 왕의 권력을 뜻한다면 가통은 가문 권력을 상징했다. 가문 권력은 다시 혼인을 통해 여러 집안이 결합된 혈연 권력으로 확장됐다. 원로 사학자인 한국역사문화연구원 이성무 원장(74)은 “가통의 실체를 알려면 족보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가문과 족보를 연구하는 학술모임 ‘뿌리회’가 탄생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2004년 5월 설립된 뿌리회는 현재 회장을 맡고 있는 이 원장을 비롯해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김학수 장서각 국학자료조사실장 등 그의 제자들이 주축이 된 단체. 여기에 주요 가문의 종친회장 등 문중 인사들과 역사를 공부하고자 하는 일반인도 가세해 현재 회원은 400여 명에 이른다.》
“조선을 연구하는 데 필요한 자료가 문중에 다 있습니다. 문중 사람들이 족보 등 고문서를 제공하며 도움을 주다가 아예 뿌리회 회원이 된 것입니다. 이들 중 고위 관직이 있다가 은퇴한 사람도 꽤 됩니다. 아무래도 가문은 관직을 한 사람을 우대하기 마련이지요.”
뿌리회는 매해 네 차례씩 명문가를 답사했고 수시로 크고 작은 학술모임을 진행해왔다. 지금까지 총 27개 가문을 연구했고 이 중 10개 가문을 추린 책 ‘조선을 이끈 명문가 지도’(글항아리)를 최근 펴냈다. 이 원장은 “연구자료를 회원끼리만 나누는 게 아쉽다는 생각이 들어 책으로 만들었다. 기존 보학(譜學) 연구서와 달리 대중을 위한 교양서”라며 “우선 영일 정씨 포은 정몽주 가문, 광주 이씨 동고 이준경 가문, 진성 이씨 퇴계 이황 가문, 예안 이씨 외암 이간 가문 등 10개 가문을 지역별로 안배해 추렸고 매년 두 권씩 책을 낼 예정”이라고 밝혔다.
경북 영천시 임고면 우항리에 있는 포은 정몽주의 공적을 기리는 유허비. 글항아리 제공이 책이 기존 명문가 관련 서적과 다른 점은 족보를 제대로 연구했다는 것. 족보를 통해 조선의 주요 인물이 어떤 지역에 기반을 둔 가문에 속했는지는 물론이고 어떤 가문과 혼인했고 어떤 가문과 사제 관계로 얽혔는지 등을 알기 쉽게 정리했다.
예를 들어 숙종 때 소론 계열의 3대 영수인 남구만(1629∼1711), 박세당(1629∼1703), 윤증(1629∼1714)은 서로 혼맥으로 연결된 인척 관계다. 노론의 거두 이이명(1658∼1722)과 소론의 거두인 이광좌(1674∼1740)는 정파적 관점에선 ‘원수’지만 실은 이종사촌 간이다. 필자 가운데 한 명인 김학수 실장은 “조선 관료들은 대부분 혈연과 지연, 학연으로 엮여 있다”며 “권력의 핵심에 있는 이들이 어떤 네트워크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면 사료에 적힌 이들의 발언 내용뿐 아니라 뉘앙스까지도 생생하게 잡아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책에 정리된 10개 가문은 각기 다른 지역에 터전을 뒀고 가문이 지향하는 바와 성격도 달랐다. 김 실장은 “권력에 가까웠던 서울과 경기, 충청지역의 ‘여권’ 가문은 벼슬 지향적이고 국제적이며 개혁적 성향도 강했고 종손보다는 벼슬을 한 인물들로 이뤄진 문중을 중요시했다. 반면 권력을 잃고 낙향한 영남지역 ‘야권’ 가문은 학문 지향적이고 보수적이며 종손을 우대했다”고 설명했다.
이런 가문의 영향은 과거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벽진 이씨 화서 이항로 가문은 백범 김구 선생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19세기 주자학을 새롭게 연구하면서 이를 통해 국난을 극복하려 했던 이항로의 정신이 제자인 유중교에 이어 그의 제자 고능선, 그리고 백범으로 이어진 셈이다.
가문이 남긴 삶의 자취는 특별한 집안의 이채로운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역사적 자산이다. 가문과 족보의 연구는 가문을 일방적으로 옹호하고 답습하는 것이 아니다. 가문 연구를 통해 전통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는 게 뿌리회의 목표다. 이 원장은 “좋은 전통과 정신이라면 대중에게 확산하기 위해 일반인 대상의 세미나를 진행하고 답사를 강화하는 등 다방면으로 노력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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