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들의 사진사랑 이야기]<17>정의화 국회부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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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6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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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기록이자 추억…힘들때 꺼내보면 살맛이 나죠

‘서민들의 노상 식사.한 토막의 생선에 몰린 거친손에는 생활의 팍팍함이 묻어난다.넉넉하게 한 마리로 나눌 수 있는 정치를 하고 싶다.’2006. 전남 여수. 정의화 촬영.
‘서민들의 노상 식사.한 토막의 생선에 몰린 거친손에는 생활의 팍팍함이 묻어난다.넉넉하게 한 마리로 나눌 수 있는 정치를 하고 싶다.’2006. 전남 여수. 정의화 촬영.
정의화 국회부의장
정의화 국회부의장
카메라와의 첫 만남은 우여곡절 그 자체다. 고교 시절 수학여행 가서 사진 찍다 죽을 뻔한 사건 때문이다. 대학생이던 형의 카메라를 어렵게 빌려 설악산 비선대 꼭대기에서 사진을 찍다가 젖은 이끼에 발이 미끄러지며 아래로 추락한 것. 바위에 등이 긁히면서 미끄러져 내렸는데 절벽 틈새에 발이 걸려 겨우 살았다. 오른손에 쥔 카메라 때문에 왼손으로 바위를 붙잡다 보니 손톱이 모두 망가지고 옷이 해지는 등 엉망이 됐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구조되는 등 ‘스타일을 구겼지만’ 분명한 것은 형이 빌려준 카메라만은 다치지 않고 되돌려 줄 수 있었다. 그런 질긴 인연 때문일까. 훗날 그는 의대에 진학해 알아주는 의사가 되었고 지금은 관록의 4선 의원이지만 카메라와는 한시도 떨어져 지낸 적이 없다.

오랜 세월 사진을 해왔기에 사진 찍는 정치인, 사진작가 등의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최근엔 2010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명사초대 사진전에 참여했고 부산 프랑스문화원 특별전에 초대되는 등 작가 수준의 사진 활동도 한다. 주인공은 정의화 국회 부의장(63). 최근엔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언론에 자주 그의 모습이 비친다. 사진 이야기를 듣기 위해 방문한 서울 여의도 국회 부의장실에는 그가 찍은 사진들이 사방에 걸려있었다.

비대위원장 하시느라 사진 찍을 시간도 없겠습니다.

“최근엔 한나라당 일로 좀 바쁩니다만 평소엔 카메라를 늘 곁에 둡니다. 동료 의원들도 찍어 드리고 홈페이지에 제가 찍은 사진을 올리기도 합니다. 요즘 사진 찍기는 휴식을 겸한 여가 활용 정도입니다. 주변을 산책하면서 좋은 풍경이 있으면 한두 컷 눌러보는 정도죠.”

고교 시절 형의 권유로 사진을 한 것으로 압니다. 그 얘기부터 해주시죠.

“3년 전 돌아가셨는데 형은 초중고교부터 대학까지 3년 선배로 모두 나와 같은 학교를 다녔고 의사로서 전공도 신경외과로 같았으니 인생의 향도(嚮導·일정한 곳으로 인도하는 사람)나 마찬가지였던 분이죠. 고교 2학년 때 부산대 사진예술연구회 주최 전국 고교생 촬영대회가 있었어요. 연구회 멤버였던 형이 ‘너도 내봐라’ 하기에, 형 카메라를 빌려 찍은 사진을 출품했는데 입상을 했어요. 생애 처음으로 입상을 하니 사진에 대한 관심이 부쩍 커졌어요.”

그때부터 사진에 빠져들었겠네요.


“제대로 사진 활동을 한 것은 대학 때입니다. 대입 기념으로 아버지가 중급 수준의 캐논 카메라를 사 주셨는데 얼마 뒤 일본에 계신 친척이 입학을 축하한다며 또 카메라를 보내 주셨어요. 당시 사진 찍는 사람들의 로망인 SLR 카메라와 135mm 렌즈를 보내주셨으니 얼마나 좋았겠어요. 푹 빠졌죠. 그런데다 제가 대학 2학년 때 합기도를 하다 급성디스크에 걸려 허리를 못 쓰게 되면서 좋아하는 운동을 못하게 되었어요. 겨우 걸어 다닐 수 있는 정도였기에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사진 찍는 것밖엔 할 게 없었지요.”

대학 시절 얘기를 좀 더 해 주시죠.


“부산대 의예과 2학년이었던 1968년 부산 국제신문 주최 전국 어린이사진 콘테스트에 출품했는데 거기서 특선을 했어요. 내 이름 석 자가 처음으로 신문에 나왔죠. 이후 형님의 권유로 부산대 사진예술연구회에 가입했고 이어서 학보사 사진기자가 됐어요. 당시 사진기자 활동비 3000∼4000원에 결혼식 사진 아르바이트로 약 4000원, 아버지가 주신 용돈 4000원까지 합하면 늘 주머니가 두둑했어요. 그 돈으로 친구들도 만나고 사진을 찍으러 멀리 다니기도 했어요. 부산에선 눈을 보기 어려워 서울까지 가서 찍은 ‘눈길에 자전거를 타고 일하러 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대구 매일신문 공모전에서 가작에 당선되었어요. 의대 졸업앨범에도 제가 찍은 사진들이 많이 들어가 있고요. 본과를 마칠 무렵엔 개인전도 했어요.”

대학 시절 개인전이라니 대단한데요.


“당시는 전시장이 없는 시절이라 주로 다방 전시였습니다. 1972년 부산 광복동에 있던 ‘수 다방’에서 첫 전시회를 했어요. 대단한 사진을 찍어서라기보다는 의대 6년간 찍은 사진을 총정리한다는 의미였지요. 그 후에는 레지던트 등을 거치면서 바빴기 때문에 사진 활동이 뜸해졌어요. 부산대 사진동아리인 효원사우회 전시회에만 출품하는 정도였지요.”

그의 사진 찍는 스타일은 다분히 고풍스럽고 낭만이 묻어있다. 자기만의 특징이 있다. 줌렌즈를 잘 쓰지 않는다. 그걸 쓰면 게을러진다고 생각한다. 대신에 지금도 135mm 렌즈와 200mm 렌즈의 앵글 각도를 검지와 중지로 정확히 나타내 보인다. 사진을 찍을 때 연사를 즐기지 않는다. 사진을 마구 찍기보다 구도, 앵글을 정확히 잡아내 트리밍하지 않은 그대로의 사진을 작품화하는 데 자부심을 느낀다.

사진은 어디서 배웠습니까.

“전반적인 것은 책, 잡지 등을 보며 독학으로 배웠어요. 좀 더 깊은 부분은 당시 부산대 사진예술연구회를 지도해 주신 정인성 선생님과 ‘인간’ 시리즈로 유명한 최민식 선생님에게서 배웠습니다. 저는 최민식 선생님의 영향이 커서 지금도 인간의 삶이나 인물 위주의 사진을 많이 찍습니다.”

사진에 얽힌 추억도 많겠습니다. 러브라인도 있어 보입니다.


“사진은 기록이자 추억이잖아요. 사진에는 찍은 사람만이 아는 사연이 숨겨져 있어요. 제 사진도 대부분 남들은 모르는 나만의 스토리가 있지요. 사실은 고3 때부터 사귀던 여자친구가 있었어요. 그 친구는 서울서 대학을 다녔는데 2년 5개월 정도 사귀다가 제가 차였지요. 그 이후에 눈 사진을 찍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적이 있었어요. 모래내에 있는 친구 집에 묵었는데 다음 날 함박눈이 내리기에 정신없이 눈 사진을 찍었어요. 그러다 문득 내 위치를 살피니 나를 차버린 녹번동 여자친구네 집 앞에 서있는 거예요. 여자친구의 집 앞까지 가본 적은 있지만 서울 지리가 어두워 모래내에서 녹번동 가는 길은 전혀 몰랐거든요. 아마도 그때까지도 마음속에 있었나 봐요. 저는 그 친구가 살고 있는 집 주변에서 사진을 찍으며 맴돌다가 결국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났고 제 첫사랑도 거기서 끝이 났지요. 당시 찍은 ‘눈 오는 사진’을 보면 그런 추억이 아련히 떠오르죠. 나만의 스토리가 많다 보니 학창 시절을 정리하는 졸업 사진전도 갖게 된 것이고요. 사람들은 저한테 어떻게 그렇게 에너지가 넘치냐고 해요. 그러면 ‘저는 추억을 먹고 살아요. 마음이 힘들 때 앨범을 꺼내 봅니다’라고 말해요. 오래된 사진을 보면서 옛날엔 내가 이랬었지 하고 떠올리면 순수해지면서 초심을 다시 찾아요. 그게 다시 에너지로 환원되는 거예요.”

의사가 된 뒤 사진과는 아주 멀어졌나요.


“사진이 이미지라고 보면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저는 신경외과 전문의인데 미국에서 의사자격을 따면서 배운 세부 전공이 미세뇌혈관 수술이었어요. 이 분야는 현미경을 카메라 파인더처럼 들여다보면서 수술을 하는데 필요한 부분은 셔터 릴리스로 사진을 찍으면서 수술을 진행해요. 그러니 피사체만 다를 뿐 사진 찍는 행위 자체는 똑같아요. 뇌 척수액과 어우러진 인간의 뇌를 들여다보면 아기들은 핑크색, 신경은 노란색, 정맥은 좀 검고, 동맥은 빨간색으로 정말 아름다워요. 보이는 장면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어요. 그러다 보면 5∼6시간씩 수술을 해도 시간 가는 줄 모르죠. 그때 많은 수술을 하면서 찍어 둔 필름이 아직도 한가득 보관돼 있습니다. 언젠가 그 필름들을 이용해 후학들을 위한 책을 쓸 작정입니다.”

사진 찍히기를 가장 좋아하는 직업은 연예인과 정치인이다. 현역 정치인이기에 찍히는 사진과의 연관 관계도 물어봤다.

‘일터를 향해’ 서울 모래내. 1969. 대구 매일신문 당선작
‘일터를 향해’ 서울 모래내. 1969. 대구 매일신문 당선작


사진을 ‘찍기도’ 하지만 정치인으로 더 많이 ‘찍히는’ 편입니다.

“찍는 것과는 180도 다르죠. 지금도 사진 찍힌다는 것을 의식하면 몸이 굳어요. 그런데 국회에서 저도 모르게 찍히는 사진 때문에 당황스러울 때가 많아요. 취재 카메라가 많을 경우 코가 가렵거나 안경이 내려와도 손을 못 댈 때가 있어요. ‘곤혹스러운’ 등등 이상한 사진설명이 붙어 보도될 때가 많거든요. 의사당 안에서 업무상 펼쳐 놓은 메모를 찍는다든지 휴대전화 문자를 찍어 보도하는 것에 대해 기자니까 이해는 하지만 품격에는 분명 문제가 있어요. 남을 엿보는 피핑(peeping) 기능이 너무 발달한 것 같습니다. 의원들이 진짜 품격에 맞지 않게 딴짓하는 것을 보도해야겠지요.”

일부러 그런 식으로 언론에 흘리는 경우도 있지 않나요.

“그런 일도 있지만 나는 그런 식의 커뮤니케이션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사진을 하면서 정치에 도움이 된 점이 있다면….

“사진은 구체적으로 특정 사물에 초점을 맞춰 찍잖아요. 따라서 사물의 구석구석까지 자세히 봐요. 시장 좌판 아주머니의 곁을 스쳐 지나더라도 그분의 표정을 통해 금방 현장의 느낌을 읽어낼 수 있지요.”

지역구인 부산 산복도로의 풍경을 찍어 홈페이지에 올려놓으셨는데….

“산복도로는 6·25전쟁 당시 피란민촌으로 지금도 부산에선 낙후한 지역에 속하지요. 앞으로 재개발될 경우 옛 모습이 사라지잖아요. 그럴 때 대비해 자료용으로 이른 아침 일어나 사진을 찍어 두었어요. 저에게는 추억이 있는 장소이기도 하고요.”

필름 카메라도 쓰시나요.

“나이가 드니까 디지털카메라가 편해지더군요. 몇 년 전 5DMarkⅡ 두 대를 큰맘 먹고 구입했어요. 저는 직업 특성상 서울과 제 지역구인 부산 중구, 동구를 자주 오갑니다. 국회의원이 카메라를 메고 비행기를 타면 모르는 사람이 보면 놀러 다니는 것 같잖아요. 렌즈까지 들고 다니면 무겁기도 하고요. 그래서 서울과 부산에 각각 카메라와 렌즈를 두고 사진을 찍습니다.”

국회에 개인 전시장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국회 지하통로에는 여러 의원의 예술작품이 걸려 있습니다. 본관 지하에서 의원회관으로 가는 초입에 첫 번째로 걸린 2점이 제 작품이에요. 그 사진을 2, 3개월마다 새롭게 교체합니다. 그러니 전용 전시장인 셈이지요.”

앞으로 사진 관련 계획이 있다면….


“연말쯤 정기국회 끝나고 사진집 출판기념회를 겸해 사진전을 열 계획입니다. 앞으로의 일은 모르는 만큼 국회의원을 하면서 찍었던 사진으로 또 한 번 인생의 한 단락을 정리할 겁니다.”

안동 하회마을 소나무숲, 2009
안동 하회마을 소나무숲, 2009


그의 정치철학은 국회의원이 된 뒤 자신의 이름(정의화)을 새롭게 풀이한 ‘정의(正義·Justice)’와 ‘화(和·Peace)’에 담겨 있다. 인생철학은 좀 다르다. 요즘 그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중 ‘진인사’를 생각하며 살고 있다.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하는 소신 때문이다.

“사람은 죽기 직전에 길든 짧든 의식이 명료한 시간이 꼭 찾아온다고 합니다. 그때에 ‘내가 뭘 이루었다’가 아니라 ‘내 신념대로 인생을 살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세상을 끝내고 싶어요.” 그러면서 이어지는 한마디. “죽는다는 것은 카메라 셔터가 딱 닫히는 순간이잖아요. ‘소신 있게 살다 간 증표의 사진 한 장’이면 저는 족합니다.”(그의 사진을 보려면 인터넷에서 ‘정의화’를 검색해 그의 공식 홈페이지에 들어가 ‘특별한 취향’이란 항목을 찾으면 된다)

“사진에는 찍은 사람만이 아는 사연이 숨겨져 있어요. 제 사진도 대부분 남들은 모르는 나만의 스토리가 있지요. 오래된 사진을 보면서 옛날엔 내가 이랬었지 하고 떠올리면 순수해지면서 초심을 다시 찾아요.”

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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