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인터뷰]내 인생을 바꾼 사람 한경희 대표의 ‘아버지’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6월 18일 03시 00분


무섭던 그 분이 편지를… 난 펑펑 울었다

“경희야.”

수화기 너머로 어머니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숨이 막혔다. 알 수 없는 불길한 기분. 등 뒤에서 누가 내 머리를 내려치기라도 한 듯 뒤통수가 아팠다. 빗나가길 바랐던 짐작은 틀린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방금 돌아가셨다.”

몇 분이 흘렀을까. 그냥 먹먹했다. 감정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정신을 좀 차리고 보니 묵직한 돌을 매단 듯 가슴이 내려앉았다. 문득 며칠 전 아버지가 한 얘기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경희야, 아무래도 네가 잘되는 걸 못 보고 갈 것 같다.”

그땐 아버지의 말을 한 귀로 흘려보냈다. 아버지는 내게 항상 ‘산’ 같은 존재였다. 절대 무너지지도 않고, 그림자 크기조차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산.

아버지…. 그는 내 인생에서 어떤 존재였을까. 악보로 표현하자면 내 인생은 그에 대한 ‘원망과 동경의 변주곡’이었지 않을까.

○ 고지식한 원칙주의자

한경희 대표는 “아버지가 보고 싶다. 그냥 꼭 한번 안아드리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아버지 이야기를 하며 한껏 웃었고, 또 울었다. O2는 한 대표를 15일 서울 금천구 가산동에 있는 ‘한경희생활과학’ 본사에서 만났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한경희 대표는 “아버지가 보고 싶다. 그냥 꼭 한번 안아드리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아버지 이야기를 하며 한껏 웃었고, 또 울었다. O2는 한 대표를 15일 서울 금천구 가산동에 있는 ‘한경희생활과학’ 본사에서 만났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너 아직도 안 자고 뭐하니.”

학창시절 오후 10시만 되면 이런 불호령이 떨어졌다. 교육자인 아버지는 항상 이랬다. “여자가 공부 잘해봐야 쓸모가 없다. 그저 시집 잘 가서 현모양처로 살면 되는 거야.”

난 그런 생각을 바꾸고 싶었다. 여자도 남자 못지않게 돈 잘 벌고, 인생을 개척할 자격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당신 생각보다 똑똑한 딸이란 걸 증명하고 싶었다. 그래서 관심 없는 척하면서도 공부에 악착같이 매달렸다. 한번은 촛불을 켜놓고 공부하다 깜빡 잠들어 집에 불을 낼 뻔했다. 일찍 자라는 아버지의 눈을 피해 그런 건데 그 덕분에 난 그날 평생 기억에 남을 만큼 꾸지람을 들었다.

어린 내게 아버지는 언제나 무서운 사람이었다. 인상부터 부리부리했다. 집에 놀러 온 친구들은 이구동성으로 “경희 아빠 진짜 무섭다”라면서 다시 올 엄두를 못 냈다. 하루는 아이들이 자기 아빠에게 어리광 피우는 걸 보고 따라했다. 아버지는 그 모습에 불같이 화를 냈다. “발음을 똑바로 안 하면 혼난다.” 그만큼 당신은 고지식한 원칙주의자였다. 그리고 난 적잖이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하지만 어린 시절 존경하는 인물을 꼽으라면 난 아버지를 가장 먼저 떠올렸다. 특히 아버지가 입에 담배를 물고 책 읽는 모습이 내겐 그렇게 근사할 수 없었다. 딱딱하고 건조하고 비관적인 아버지의 말투조차 내겐 모방의 대상이 됐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말다툼을 하면 오빠들은 항상 어머니 편을 들었다. 하지만 난 언제나 아버지 편에 있었다.

○ 지독한 방황… 그리고 자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여대를 간 대학 시절, 난 지독한 방황을 했다. 아버지는 다소 괴팍하고 삐딱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봤다. 항상 그랬다. 그래서 어린 내게도 세상은 그렇게 보였다. 불의에 가득 차 있는 모순의 공간. 내 마음 한구석엔 ‘잔 다르크’처럼 세상을 개혁해야겠단 생각이 늘 꿈틀대고 있었다.

하지만 대학에 와서 세상에 발을 디디니 생각이 달라졌다. 세상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낭만을 느끼고 행복해지고 싶었다. 어쨌든 혼란스러웠던 나는 아버지를 원망했다. 나를 삐딱하게 만든 장본인이 아버지라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악착같이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모았다. 밥 먹을 돈까지 아껴가며 일을 했다. 하루빨리 아버지의 구속에서 벗어나 독립하고 싶었다. ‘파랑새’를 찾아 자유와 행복을 만끽하고 싶었다. 결국 2학년 때 모은 돈으로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했다. 외국인 여자 친구들과 함께 산다는 거짓말로 아버지를 설득했다. 하지만 거짓말은 탄로 났고, 한 달도 못 가 다시 집으로 끌려왔다.

집으로 온 뒤에도 아버지의 굴레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여전했다. 아버지가 쳐놓은 그물 너머 세상으로 나가고 싶었다. 마침 그때 스위스 로잔에 있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사무국에서 직원을 뽑는다는 공고가 떴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지원했고, 결과는 합격. 날짜를 받고 출국 날짜만 기다렸다. 출국 날 공항에서 아버지와 마주 섰다.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는 그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난 그 말을 들을 여유도 없었다. 독립할 수 있다는 해방감과 세상을 다 가진 듯 기쁨에 취해 있었다.

○ 사랑한다, 그리고 자랑스럽다

1986년 9월 어느 날. 새벽 안개를 뚫고 스위스 제네바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 발을 딛는 순간 외로움이 밀려왔다. 고향의 냄새가 그리웠다.

IOC의 일은 무료했다. 동료들은 작은 체구의 낯선 동양인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우울한 나날이 계속됐다. 장밋빛으로만 여겼던 스위스 하늘도 잿빛으로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스위스에 온 지 두 달쯤 지났을까. 편지 한 통이 왔다. 발신자는 아버지였다.

‘왜 소식 한번 없는 게야? 기어코 이 애비가 먼저 연락해야 하는 거냐? 옷 든든하게 입고 끼니 거르지 말거라. 읽으면 도움이 될 것 같아 책 몇 권 보낸다. 네가 자랑스럽다. 사랑한다.’

마음이 울컥했고, 눈에선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내용은 길진 않았지만 한마디, 한마디에서 당신의 마음이 느껴졌다. 아버지는 이 편지에서 처음으로 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했다. 내가 그렇게 간절하게 듣길 원했던 ‘자랑스럽다’는 말도 처음으로 했다. 정말 편지가 닳도록 읽고 또 읽었다. 편지를 볼 때마다 눈물이 났다. 이후 스위스를 떠나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할 때도 아버지가 보낸 편지들은 지친 마음을 달래주는 ‘만병통치약’이었다.

1994년. 오랜 외국 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에 왔다. 오랜만에 아버지를 봤지만 대화는 얼마 없었다. 그냥 서로 마주보고 한참을 웃었다. 아직도 모르겠다. 그때 왜 그렇게 웃었는지.

한국에 온 뒤엔 공무원 시험(5급 공무원 특채)을 쳤다. 그래서 공무원이 됐지만 마음속에선 언제나 사업을 꿈꿨다. 난 어렸을 때부터 돈을 벌고 싶었다. 성공해서 아버지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한편으론 현모양처를 원하는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결국 사업에 뛰어들었다. 주변 사람들 대부분이 말렸다. 특히 아버지 반대가 완강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반대가 워낙 심하다 보니 서운함도 커졌다. ‘그래도 딸이 한번 해보겠다는데….’

○ 꿈에 오신 그 분 “걱정하지 마”

기대와 달리 사업은 난관의 연속이었다. 5000만 원 정도 예상했던 사업 자금은 8억 원을 넘어섰고, 제품 시판도 기약 없이 미뤄졌다. 은행 대출도 받지 못할 만큼 궁핍한 상황. 그때 아버지가 조용히 나를 불렀다. 아무 말도 없이 집문서를 내밀었다. “믿는다”고 했다. 그날 밤, 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거듭된 실패 끝에 사업은 성공했다. 2004년 연매출 150억 원을 달성했고, 이듬해엔 500억 원을 채웠다. 하지만 아버지가 계시지 않았다. 아버지는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기 직전인 2003년 5월 세상을 떠났다.

사업은 안정세에 접어들었지만 마음 한구석엔 항상 빈자리가 있었다. 아버지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아버지가 나타났다. 평소 한 번도 입지 않았던 흰색 한복을 곱게 입고 나를 불렀다. 나는 평소 그랬듯 퉁명스럽게 물었다. “가시니까 좋으세요?” 특유의 무뚝뚝한 표정을 지으며 아버지가 말했다. “여기 오니까 너무 좋다. 걱정하지 마라. 오래 살았다.”

아버지는 그 한마디를 남기고 갔다. 그렇게 당신 방식으로 작별인사를 했다.

요즘 어머니는 아버지 얘길 많이 한다. 생전에 내 얘길 그렇게 많이 했다고 한다. 내 앞에선 애교 한번 안 받아준 무뚝뚝한 당신이었지만, 내가 없을 땐 “아들보다 자랑스러운 딸”이라며 흐뭇해했단다.

우리 식구는 별일 없으면 항상 아침, 점심, 저녁을 함께 먹었다. 아버지는 “한 식구는 한 상에서 밥을 먹어야 정이 싹튼다”라며 이런저런 얘기를 늘어놓았다. 그땐 그 일장연설이 왜 그렇게 지루했던지. 그런데 오늘따라 그립다. 그 굵은 목소리가, 아버지 특유의 말투가….

신진우 기자 niceshin@donga.com   

한경희(47) 씨는 1986년 이화여대를 졸업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등에 근무하다 미국에 유학, 1990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에서 경영대학원(MBA) 과정을 마쳤다. 미국에서 귀국 후 1996년 5급 공무원 특채시험에 합격해 교육부 사무관으로 일했다. 1999년 한영전기를 설립, 2005년 ‘한경희생활과 학’으로 이름을 바꿨다. ‘한경희 스팀청소기’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대표적인 여성사업가로 자리 잡았다. 최근 주방용품 사업에 뛰어들어 마그네슘 프라이팬을 선보이는 등 제2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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