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숨소리 하나만으로도 온 숲의 고독이 깨어나던 곳 바람이 고요히 물결을 떼밀어 열목어들, 물속의 처마에 걸어둔 풍경처럼 은은히 울리던 곳 전생의 애인이 하얗고 소담한 꽃으로 피어나 환하게 길을 비추어 주던 곳 물소리 먹고 자라난 나무들이 물소리 나는 나뭇잎들을 종처럼 매달고 우는 곳 아, 아침가리의 길을 나는 천상에서의 기억처럼간직하고 있네
-박정대의 ‘아침가리, 새들이 날아가 죽는 곳’에서
강원 인제(麟蹄)는 한자로 ‘기린발굽’이란 뜻이다. 왜 하필 기린발굽일까. 인제군의 모양이 기린발굽을 닮아서일까? 하기야 고구려 땐 ‘돼지족발’을 뜻하는 저족현(猪足縣)이었으니 그럴지도 모른다. 어쨌든 인제는 초식동물 발굽처럼 폭에 비해 남북이 길쭉한(72.1km) 장방형이다.
인제는 1000m 넘는 산이 무려 96개나 된다. 사방에 우뚝우뚝 기둥처럼 서 있다. 설악산 향로봉 점봉산 방태산 소뿔산 주억봉 구룡덕봉 가칠봉 한석산 매봉 안산 가리봉 가마봉…. 그 아래로 800m 이상 봉우리 200여 개가 첩첩이 틈새를 메우고 있다. 마치 호리병 속에 꽉 갇혀 있는 모양이다.
밖으로 한 번 나가려 해도 진부령(529m) 미시령(826m) 한계령(935m) 곰배령(1164m) 단목령(760m) 북암령(925m) 조침령(770m) 같은 큰 고개를 넘어야 한다. ‘하늘이 3000평’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산이 높으니 하늘이 손바닥만 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인제는 전국에서 두 번째(1위 홍천군)로 넓지만, 인구밀도는 가장 낮다(km²당 20명).
인제에서 경작지는 “100평 200평…” 식으로 세지 않는다. 보통 ‘가리’나 ‘둔(屯)’을 쓴다. ‘가리’는 골짜기 곳곳의 ‘밭갈이할 만한 땅’을 말한다. 가령 ‘아침가리’란 아침햇살이 잠깐 비칠 때 밭갈이할 만한 땅이다. 한자로는 ‘朝耕洞(조경동)’이라고 한다. 연가리는 옛날 담배농사(연초)를 많이 했던 밭이다. 적가리는 가을에 단풍이 붉게 드는 곳이다.
보름가리는 보름은 갈아야 하는 넓은 땅이다. 인제에서는 4가리가 유명하다. 아침가리 연가리 적가리(곁가리·방태산휴양림 자리) 명지가리가 바로 그곳이다.
홍천군 내면 쪽에는 3둔이 있다. 둔은 사람들이 모여 살 만한 산기슭의 평평한 둔덕을 말한다. 살둔(생둔) 월둔 달둔이 그렇다. 곰배령 바로 아래 인제 쪽엔 귀둔리(주민들은 ‘귀뚠’이라고 부른다)도 있다. 방태산을 중심으로 북쪽엔 4가리가, 남쪽엔 3둔이 숨어 있다. 방태산 언저리는 예로부터 은둔자들이 스며들어 살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아침가리계곡은 깊다. 구룡덕봉(1388m) 기슭에서 발원해 20여 km에 이른다. 물은 차고 맑다. 코스는 계곡물길 따라 간다고 보면 된다. 계곡 양쪽 옆의 숲길은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다. 왼쪽 길로 갔다가 길이 지워지면, 냇물을 가로질러 오른쪽 길을 찾아야 한다. 폴짝폴짝 물 위에 드러난 징검다리 돌을 딛고 건너는 맛도 괜찮다.
양쪽 시냇가에 길이 없다면 물 한가운데로 첨벙첨벙 가야 한다. 시원하다. 어린 시절 물장구치며 놀던 기분이다. 길 찾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길은 종종 잃었다가 찾아봐야 걷는 맛이 난다. 트레킹의 원래 맛이 살아난다. 장마철 비가 많이 내리면 길은 아예 끊긴다. 골짜기에 물이 차면 모든 길이 지워진다. 장마가 지나가고 나면 다시 길이 열린다.
등산화 대신 발등을 단단히 묶어주는 ‘스포츠샌들’이 필수다. 카메라도 찍은 뒤엔 그때그때 비닐로 싸서 배낭에 넣는 게 좋다. 휴대전화는 어차피 터지지 않으니 처음부터 신경 끌 일이다. 지팡이는 몸의 균형을 잡아주는 지렛대 역할을 한다. 시냇물 바닥의 돌에 이끼가 많아 미끄럽다. 한눈파는 순간 물웅덩이에 풍덩 빠진다.
계곡은 온통 돌이다. 조약돌, 자갈, 호박돌, 바윗돌, 집채만 한 바위…. 지난해 없던 바위가 어디선가 굴러와 턱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다. 계곡 바위는 물 따라 굴러다닌다. 큰비가 쏟아질 땐 바위 구르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들린다.
햇살이 계곡물에 부딪혀 자지러진다. 산들바람이 살갗에서 꼼지락거린다.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에 하늘의 비행기 소리까지 버무려진다. 마당바위엔 바위취가 하늘거린다. 하얀 산목련 꽃잎이 지고 있다. 누렇고 너절하게 벌러덩 누워 있다. 인제 출신 박인환 시인(1926∼1956)은 노래한다. 꽃이 피기는 쉬워도, 지는 건 한순간이라는 것을.
‘조선의 협객’ 백동수(1742∼1815)는 1771년 무과에 급제했다. 하지만 서자 출신이라 좀처럼 벼슬길이 열리지 않았다. 자연히 하루 입에 풀칠하기에도 힘들었다. 그러자 백동수는 1773년 미련 없이 늙은 부모를 비롯한 가족을 이끌고 강원도 첩첩산중으로 들어갔다. 단칼에 구차한 ‘한양살이’를 접어버린 것이다. 역시 그의 호 ‘야뇌(野뇌)’답다. 야뇌란 ‘황야의 굶주린 늑대’ 정도의 뜻으로 풀이하면 될까?
백동수는 그곳에서 10년 동안 ‘송아지를 짊어지고 들어가 키워서 밭을 갈고, 소금 된장이 없는지라 산아가위와 돌배로 장을 담가 먹으며’ 살았다. 백동수가 정착했던 곳이 바로 인제군 기린골(현 기린면 진동계곡)이다. 당시 ‘그곳은 큰 산봉우리와 깊은 골짜기로서 나뭇가지를 부여잡고서야’ 들어갈 수 있었다. 문밖을 나서면 ‘열 손가락에 못이 박인 나무꾼과 봉두난발의 광부들만이 화롯불을 앞에 두고 빙 둘러앉아 있고, 밤이 되면 바람이 쏴아 불어 집을 스쳐 돌아가고, 슬픈 짐승들이 끊임없이 울부짖는 그런 곳’이었다.
백동수의 친구들은 박지원 홍대용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등 당시 조선의 내로라하는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어디까지나 책상머리에서 시나 짓고 공자 왈 맹자 왈 하는 먹물이었다. 그렇다고 백동수는 그의 나약한 젊은 벗들을 비웃지 않았다. 껄껄 웃으며 모두 품에 안았다. 젊은 날, 그의 가난뱅이 먹물들이 한양 도성 주위에서 무위도식하며 맴돌 때 백동수는 주저 없이 한낮에도 어두컴컴한 강원도 산골짜기에 들어가 온몸을 부리며 살았던 것이다.
요즘 진동계곡에는 산사람, 귀농인, 은퇴자, 화가, 환경운동가, 공동체생활자, 시인, 소설가, 수행자, 병 치료자, 은둔자 등 온갖 사람들이 언젠가부터 하나둘씩 스며들어 살고 있다. 모두가 ‘독립특행(獨立特行)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들이다. 각자가 ‘하나의 왕국이고 하나의 세계’이다. 도회지살이의 고단함, 번잡함 그리고 밥벌이에 진저리를 쳤을 것이다.
마침 진동계곡엔 민박집(펜션)이 ‘비 온 뒤 죽순 돋듯’ 하고 있다. 계곡물도 예전만큼 깨끗하지 않다. 아무리 좋은 땅도 사람이 들끓으면 언젠간 망친다. 이제라도 땅과 사람이 어우러져 살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노랗게 덮인 곰배령… 왕복 4시간 코스▼
곰배령은 점봉산에 있는 해발 1164m 높이의 고개이다. ‘곰이 배를 벌떡 뒤집고 누워 있는 모습’이라서 이름이 그렇게 붙었다. 퉁퉁한 아빠곰 뱃살처럼 평평하고 완만하다. 옛날 인제 사람들은 이 고개를 넘어 동해안의 양양시장을 오갔다. 인제의 산채 약초 감자 등을 그곳에서 쌀 소금 미역으로 바꿔 돌아왔다. 봄여름 가을1652.90m² (500여 평) 넓이의 둔덕에 850여 종의 온갖 들꽃이 피었다가 진다.
‘점봉산 가는 길/오늘은 곰배령까지만 간다 거기/지천으로 피었다 동자꽃/동자꽃 안주하여 술 한 잔 마신다/나도 마시고 안개도 마신다/물봉선도 취하고 노루귀도 취하고 바람꽃도 취한다/묻는다. 세상은 왜/감탄만으로 살 수 없는 것이냐고/없는 것이냐고//마을로 내려와 안개를 토했다’ (권혁소의 ‘곰배령’ 전문)
6월 곰배령은 노란 미나리아재비꽃이 지천이다. 언뜻 보면 애기똥풀 같지만 꽃잎이 5장(애기똥풀은 4장)이다. 꽃이 유화물감처럼 광택이 난다. 노란 비닐로 코팅한 것 같다. 깃꼴겹잎이 미나리를 닮았다. 뿌리에서 쥐오줌 냄새가 난다는 연분홍 쥐오줌풀꽃도 곳곳에 피었다. 백당나무 하얀 꽃이 다복솔처럼 웅크리고 있다. 벌 나비를 꾀는 헛꽃이 앙증맞다.
전호(前胡) 하얀 꽃은 꽃잎을 우산살처럼 활짝 펼치며 으스댄다. 자줏빛 띤 갈색의 매발톱꽃이 한쪽에서 의뭉하게 웃고 있다. 꽃잎 뒤쪽의 꿀주머니인 ‘꽃뿔’은 아무리 봐도 영락없는 매 발톱이다. 곰배령 주위엔 빙 둘러 층층나무 하얀 꽃이 켜켜이 피어 있다.
곰배령은 점봉산(1424m) 능선이다. 한계령 북쪽이 설악산이고 그 남쪽이 점봉산이다. 점봉산은 후덕한 흙산이다. 참나무 등 활엽수가 울창하다. 더덕 참나물 두릅 곰취 고비 송이버섯 느타리버섯 석이버섯 산양삼 토종꿀 등 없는 게 없는 보물 숲이다. 유전자원보호구역으로 입산이 금지돼 있지만 곰배령 오르는 길은 허용된다. 다람쥐가 쪼르르 길을 가로지르고 멧돼지가 마구 파헤쳐 놓은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곰배령길은 4.8km로 왕복 4시간이면 충분하다.
‘그대 한눈팔다 들어간 길/한참 되돌려 나올 때/그대의 숨은 눈빛 끌어내어/빛만 남기고 사라지던 꽃/마타리, 어수리, 궁궁이/그 뒤쪽 어딘가/자취 없이 흔들리던 꽃//그 꽃에 홀려 나는/곰배령 넘어 그대에게 간다’ (신대철의 ‘곰배령 넘어-무슨 꽃 1’에서)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 Travel Info
[교통]승용차 서울→춘천→동홍천 나들목(국도 44호선)→인제→현리→진동리, 서울→양평(국도 44호선)→홍천→인제→현리→진동리 버스 동서울∼인제(2시간 20분 소요), 서울 상봉동∼인제(2시간 40분 소요)
[민박]진동계곡 민박집 주인들은 인생 고수가 많다. 멋진 주인을 만나면 인생 이야기도 함께 나눌 수 있다. 거친 강호에서 산전수전에 육박전까지 경험한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전화로 몇 마디만 나눠 보면 금세 알 수 있다. 도시 아이들의 산골교육까지 자연스레 해결될 수 있다. 각각의 집 앞에 걸려 있는 안내판에서도 주인장의 냄새가 물씬 난다.
[곰배령탐방 사전예약제]수 목 금 토 일요일만 입산이 허용된다. 인제국유림관리소(033-463-8166, 7)에 입산 전날 오후 6시까지 신청해야 가능. 탐방객 하루 200명으로 제한. 진동삼거리를 출발해 강선마을을 거쳐 곰배령에 이른다. 신분증을 제시해야 입산허가증을 내준다. 봄가을 산불예방 기간(2월 1일∼5월 15일, 11월 1일∼12월 15일)엔 입산이 전면 금지된다. 탐방 가능 기간(12월 16일∼다음해 1월 31일, 5월 16일∼10월 31일)에도 매주 월 화요일엔 문을 닫는다. [안내]인제군 문화관광과 033-460-2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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