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안 스위트’는 2004년 46세의 나이에 암으로 숨진 재일교포 여배우 김구미자 씨의 마지막 무대를 위해 친구였던 재일교포 극작가 정의신 씨가 쓴 작품이다. ‘야끼니꾸 드래곤’과 ‘겨울 선인장’까지 올해 벌써 세 편이나 무대화된 정의신 작가의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사회적 열패자다. 속칭 ‘루저’들이다.
국내 초연 중인 연극 ‘아시안 스위트’(김제훈 연출)의 여주인공 치요코(이항나)는 ‘야끼니꾸 드래곤’의 큰딸 시즈카와 닮은꼴이다. 절름발이 노처녀면서 하필이면 유부남을 사랑한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미혼으로 술주정뱅이 아버지가 물려준 허름한 양장점을 홀로 지키고 살아가던 그에게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군식구가 하나둘 생긴다. 사업 실패 뒤 아내와 별거하면서 갈 곳 잃은 옛 애인 아사다(배성우), 아버지와 이혼하고 벌써 두 번째 다른 남자와 살림을 차린 어머니 미쓰코(김순이), 고교 졸업 후 자기 꿈을 찾아 가출하다시피 떠난 남동생 시로(김두봉)다.
연극은 치요코에게 기생하는 그 세 인물의 숨겨놓은 사연을 천천히 그러나 코믹하게 풀어낸다. 시로는 닥치는 대로 일하며 모았던 적금을 사기당해 몽땅 잃은 실업자다. 치요코는 세 번째 남편과도 이혼한 처지다. 아사다는 몸은 치요코 곁에 있지만 마음은 여전히 아내에게 가 있다. 그들은 저마다 자신들 손톱 밑에 든 가시 때문에 아파 죽겠다며 아사다의 대사처럼 ‘킹 오브 만신창이’ 자리를 놓고 진상을 부린다.
하지만 ‘퀸 오브 만신창이’는 따로 있다. 서로 자신들의 꿈을 찾는다고 버려두고 떠나놓고는 아쉬우니까 찾아와 손을 내미는 치요코다. 치요코야말로 그들 중 가장 상처가 많은 만신창이건만 그런 그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할 줄 모른다. 꽃 대신 파(蔥)로 그들의 양심을 후려칠지언정 함께 나눠 먹을 전골냄비는 남겨두는 보살이다.
제목인 ‘아시안 스위트’란 편의점에서 파는 망고푸딩의 상표명이다. 일본 서민들이 잠깐이지만 일상을 잊고 남국의 환상에 젖게 해주는 상징이다. 몽상주의자인 아사다와 시로가 좋아하는 간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실주의자인 미쓰코의 통찰처럼 “세련된 이름이라고 붙였겠지만, 내가 보기엔 푸딩은 푸딩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연극이 말하고 싶어 하는 진짜 아시안 스위트는 그들 네 식구가 사이좋게 나눠먹는 한국전통요리 전골이다. 일본사회에선 싸구려 서민음식이지만 힘든 사람들이 함께 땀 흘려 먹으면서 온정을 나눌 수 있는 그 전골 국물처럼, 가장 힘겹게 살면서도 꿈과 희망을 잃은 주변 사람들에게 꾸역꾸역 살아갈 힘을 주는 치요코 또한 진짜 ‘아시안 스위트’다.
치요코는 동시에 세상의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희생되는 눈처럼 흰 속죄양이기도 하다. 보통의 연극이라면 그 치요코에게 흰 수의(壽衣)를 입혔을 것이다. 아시안 스위트는 반대로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혀준다. 죽음을 앞둔 여배우를 위한 작가의 배려였지만 그래서 더 눈물겹다. 그 역시 ‘소설적 진실’(장례식)을 잠시 잊게 해주기 위한 ‘낭만적 거짓’(결혼식)이란 점에서 또 다른 ‘아시안 스위트’이기 때문이다. 여배우 김구미자와 고스란히 겹쳐지는 치요코의 마지막 대사가 주는 감동은 객석에서 직접 확인하기 바란다. 후줄근한 중년 사내의 열패감을 능청맞게 구현한 배성우 씨의 연기도 눈여겨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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