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말 친구가 주선해준 소개팅 자리에 나간 직장인 이모 씨(29). 카페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는데 한 여성이 다가왔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늘씬한 몸매, 센스 있는 옷차림까지. 평소 생각하던 이상형에 가까운 여성의 등장에 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혹시 이○○ 씨?”
이후 이 씨는 세 번 더 그녀를 만났다. 하지만 처음 가졌던 호감은 만날 때마다 급속도로 줄었다. 지금은 만남을 이어가야 할지 고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씨에게 물었다. 대체 이유가 뭐냐고. 그는 성격 차이 등 몇 가지를 꼽았다. 하지만 그가 밝힌 가장 큰 이유는 다소 의외였다. “목소리가 전혀 섹시하지 않았어요. 처음 만나 내 이름을 부르는 순간 여성스럽다는 느낌이 사라졌죠. 너무 딱딱하고 무미건조했거든요.”
○ 남성의 마음을 녹이는 목소리?
언제부턴가 ‘섹시하다’는 말이 이성에게 보내는 최고의 찬사 가운데 하나가 됐다. 섹시함을 평가하는 잣대는 다양하다. 외모는 물론이고 옷차림 행동 성격까지 고려된다. 특히 그 가운데 빠질 수 없는 요소가 목소리. ‘섹시한 음성의 특징 분석’(2005·정옥란 조성미·한국언어치료학회지)에 따르면 조사 대상자의 무려 48%가 “섹시함을 결정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요소가 목소리”라고 답했다.
그렇다면 이성을 확 잡아끄는 ‘섹시한’ 목소리는 어떤 것일까. 보통 남성보다는 여성의 목소리가 개성이 다양하고 특색 역시 뚜렷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설명이다. 그래서 여성 목소리를 중심으로 ‘섹시 코드’를 살펴봤다.
목소리 컨설턴트로 활동 중인 박란희 박사(계명대 신문방송학과)는 여성의 섹시한 목소리로 4대 요소를 들었다. ‘음도(音度·음의 높낮이 정도)가 낮고, 더 허스키(husky·흔히 말하는 ‘쉰 목소리’)하고, 비성(鼻聲·흔히 말하는 ‘콧소리’)이 많고, 늘어지듯 길게 끄는’ 목소리가 섹시하다는 얘기다. 실제 영화 ‘원초적 본능’에서 섹시 스타 샤론 스톤의 목소리를 더빙한 성우 강희선 씨는 이렇게 말했다. “섹시한 목소리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죠. 그래서 일부러 허스키하게 말했어요. 톤을 낮추고 목소리도 길게 뺐죠.” 최근 떠오르는 섹시 스타로 각광받는 한 여배우는 인터뷰 때마다 목소리를 ‘변조’하는 걸로 유명하다. 평소와 달리 목소리를 낮게 깔고 콧소리를 낸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연구진은 얼마 전 한 실험에서 여성들에게 섹시한 목소리를 내달라고 부탁했다. 그랬더니 대다수의 여성은 음성을 낮추고 허스키한 목소리를 냈다.
○ 섹시코드엔 공식이 없다
하지만 섹시한 목소리가 공식처럼 정해져 있는 건 아니다.
‘섹시한 음성에 대한 청지각적 분석 연구’(2006·정옥란 조성미·한국언어치료학회지)에 나오는 실험 결과가 이를 말해준다. 이 실험에서 연구팀은 연령별 성인 남성 63명을 대상으로 여성의 목소리를 다양하게 변조해 들려줬다. 그리고 섹시하다고 느끼는 수준에 따라 점수를 매기게 했다.
그 결과 남성들은 고정관념과 달리 ‘음도가 높고 비성이 적은’ 목소리에 더 높은 점수를 줬다. 음색과 관련해선 허스키한 목소리를 더 섹시하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최근 한 음성상담센터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선 20대가 가장 선호하는 목소리의 여배우로 ‘낮은’ 목소리와 거리가 먼 한예슬(30)이 뽑혔다. 음이 높고 개성 있는 목소리를 가진 한예슬은 외국 애니메이션 더빙작업, 가수의 음반작업에 참여하는 등 목소리 ‘상한가’를 달리고 있다. 방송인 현영(35) 역시 비슷한 이유로 목소리가 주목받는 케이스.
이와 관련해 이시훈 계명대 미디어경영학부 교수는 “음의 높낮이 등 몇 가지 요소만 따로 떼어 놓고 섹시함을 정형화하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사람의 목소리는 다양한 요소가 결합해 하나의 개성 있는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그 요소들이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섹시한 목소리도 다양하게 분류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유명 보컬 트레이너인 조홍경 ‘보이스펙트(Voiceffect)’ 원장 역시 비슷한 설명을 했다. “섹시한 목소리를 한마디로 설명하긴 어렵다. 여자 가수들도 음색이나 목소리 톤 등에 따라 섹시한 느낌이 다양하게 묻어난다. 특히 목소리에서도 개성이 중요해진 시대가 되면서 섹시 코드 역시 더욱 다양해졌다.”
음성치료전문가인 미국의 모턴 쿠퍼 박사는 섹시한 목소리에 대한 통념이 시대마다 변한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1950년대 대표적인 섹스심벌인 메릴린 먼로와 최근 섹시스타인 제시카 알바의 목소리만 해도 상당히 다르다는 얘기다. 김영보 가천의과대 뇌과학연구소 교수는 “어떤 목소리가 섹시하다는 인식은 결국 뇌가 그 목소리를 섹시한 이미지와 결부시켜 연상했기 때문이다. 그 이미지가 다른 목소리와 결부되고, 그 과정이 계속 누적된다면 섹시한 목소리 코드 역시 바뀔 수 있다”고 했다.
○ 섹시한 목소리? 첫 만남에선…
섹시한 목소리를 가진 여성은 첫 만남에서 항상 남성의 호감을 살 수 있을까.
꼭 그렇지는 않은 걸로 보인다. 2005년 캐나다 맥매스터대의 데이비드 페인버그 교수팀은 한 실험을 통해 “남성들은 첫 만남에서 높은 음을 가진 여성의 목소리를 더 매력적으로 느낀다”고 결론지었다. 이 대학 질리언 오코너 연구원은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이 많이 분비될수록 목소리 톤이 높아진다. 진화론적으로 인간은 반대되는 상대에게 본능적으로 끌린다. 그래서 첫 만남에서 남성은 여성의 높은 목소리에 매력을 느끼는 것”이라고 했다.
2009년 이시훈 교수팀도 연구에서 비슷한 결과를 도출했다. 연구팀은 다양한 여성의 목소리를 600여 명의 대학생에게 들려줬다. 그 결과 처음 목소리를 접한 청자에게 호감을 주는 목소리는 다름 아닌 음이 높은 목소리였다.
결국 여성의 목소리는 낮은 음이 더 섹시하다는 게 통설이지만 적어도 첫 만남에선 오히려 높은 음의 목소리가 호감을 주는 데 유리하다는 얘기다.
신진우 기자 niceshin@donga.com 박희창 기자 rambl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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