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사회가 동일본 대지진의 여파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요즘 일본 출판업계가 예기치 않은 호황을 맞았다. 가족과 직장을 잃고 황폐해진 마음을 독서로 달래려는 일본 국민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동북지역의 내륙에 위치해 지진해일(쓰나미) 피해를 보지 않은 대형 서점들은 해안지역 피해 주민들이 몇 시간씩이나 차를 타고 와 책을 사갈 정도로 특수를 누리고 있다. 일본 출판업계는 “지진 이후 ‘책의 힘’의 재발견”이라며 이를 고무적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지진 이후 일본에서 잘 팔리는 책들은 지진, 쓰나미, 원전과 관련된 책이 물론 많지만 요즘 들어서는 일본 민족과 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이른바 ‘일본 문화론’ 서적도 다수 눈에 띈다. 대지진 직후인 4월 중순 문예춘추가 출판한 ‘일본인의 자존심(日本人の誇り)’은 그중 하나다. 출판 2개월 만에 30여만 부가 팔리면서 일본인의 필독서에 올랐다.
저자인 후지와라 마사히코(藤原正彦) 오차노미즈여대 명예교수는 일본 사회가 겪고 있는 다양한 문제의 원인을 ‘일본병’에서 찾고 있다. 대지진 이후 우왕좌왕하면서 뒷수습이 지체되고 있는 것은 일본 사회가 집단적인 중병에 걸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저자가 진단한 일본병의 증상은 심각하다. 20년째 이어지고 있는 장기불황, 주요 선진국 가운데 돌출된 재정적자 규모, 13년 연속 3만 명을 넘는 선진국 최악의 자살률, 인구 감소와 고령화, 뒤처지는 일본 학생들의 학습능력 등 일일이 열거하기가 벅찰 정도다.
저자는 현재의 일본 사회를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모를 정도로 어지럽혀진 방”에 비유한다. “복합중층적인 문제에 봉착한 일본을 바꾸기 위해서는 일본 사회 전체를 관통하는 축을 일거에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잃어버린 일본인의 자존심을 되찾기 위해서 ‘개인보다 공공(公共)’ ‘돈보다는 덕’ ‘경쟁보다는 화합’을 중시해온 일본의 우수한 정신문화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해법을 제시한다. 불교와 무사도 정신에 따라 질서와 화(和)를 존중하는 1945년 이전의 이른바 전전(戰前) 시대(1868년 메이지정부 수립부터 제2차 세계대전 패전까지의 시대)에서 일본 부활의 출발점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인정과 화합이 흘러넘치는 전전시대를 지나치게 미화한 나머지 ‘역사적으로 퇴행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가난했지만 모두가 평등했던 에도시대, 온 국민이 하나로 뭉쳐 근대화를 이뤄냈던 메이지시대, 근대화 이후 제국주의 침략전쟁으로 치달았던 쇼와시대에 대한 강한 향수가 배어난다. 일본인의 긍지를 과거에서 찾으려는 저자의 노력은 한국이나 중국 등 주변국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역사적 복고주의로 읽히기도 한다. 개인의 다양한 의견과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현대사회에서 ‘개인의 희생을 감수하면서 공익을 우선해야 한다’는 주장은 시대착오적이다.
그럼에도 ‘일본인의 자존심’은 일본 전국에서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가고 있다. ‘안심·안전의 나라’ 일본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일본 국민이 슬픔에 굴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려는 모습은 아름답다. 하지만 재기를 위한 몸부림이 침략전쟁으로 치달았던 우울한 과거로의 회고적 보수주의에 기반하고 있다면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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