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듀크 오브 요크 극장에서 개막한 연극 ‘여행의 끝’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방공호에서 사투를 벌이는 영국군의 모습을 사실감 있게 그렸다. 윤석화 씨 제공
영국 런던의 웨스트엔드는 미국 뉴욕의 브로드웨이와 더불어 세계 공연산업의 양대 젖줄로 불린다. ‘오페라의 유령’ ‘미스 사이공’ ‘레미제라블’ ‘캐츠’ ‘빌리 엘리어트’ ‘맘마미아!’ 같은 뮤지컬과 ‘에쿠우스’ ‘대학살의 신’ ‘더 히스토리 보이스’ ‘워 호스’ 같은 연극이 이곳을 거치면서 세계적 문화상품이 됐다. 웨스트엔드에서도 119년 역사를 자랑하는 듀크 오브 요크 극장(640석)에서 19일 개막한 연극 ‘여행의 끝(Journey's End)’ 포스터 맨 위에 익숙한 이름 하나가 적혔다. ‘FLORA SUK-HWA YOON.’ 연극배우 윤석화 씨다.
9월 3일까지 공연될 ‘여행의 끝’은 윤 씨가 베테랑 제작자 리 멘지스와 함께 제작했다. 멘지스는 연출가 피터 홀의 조연출 출신으로 연극 ‘예루살렘’과 뮤지컬 ‘카워드의 커스터드’ 등 72편의 공연을 제작한 인물.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에서는 설도운 설앤컴 대표와 신춘수 오디컴퍼니 대표가 프로듀서로 참여한 적이 있지만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한국인 프로듀서는 윤 씨가 처음이다. 프로듀서로서 한국인의 이름이 제일 앞에 나온 경우는 브로드웨이에서도 유례가 없는 일이다.
19일 개막공연에서 만난 멘지스는 “연극에 대한 플로라(윤석화)의 지식과 헌신, 배려에 크게 감명 받아 내가 먼저 공동 제작을 제의했다”고 말했다.
로버트 세드릭 셰리프 원작인 ‘여행의 끝’은 1928년 초연 당시 20대 초반의 로렌스 올리비에가 주연을 맡은 작품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18년, 독일군의 마지막 총공세를 앞둔 영국군의 방공호를 무대로 죽음의 공포와 맞서 싸운 군인들의 모습을 사실감 넘치게 그려낸 작품이다. 여러 차례 리메이크됐는데 그때마다 흥행에 성공해 현대전을 무대로 한 연극 중 최고의 흥행작으로 꼽힌다.
이번 공연은 2004년 영국에서 데이비드 그린들리 연출로 제작된 뒤 브로드웨이로 진출해 2007년 토니상 리바이벌 작품상을 받은 작품을 새롭게 제작한 것. 영국 관객에겐 익숙한 작품이지만 19일 밤 개막공연 현장의 분위기는 숭고함까지 느껴졌다.
무대는 어둡고 비좁았다. 높이 8m가 넘어 보이는 무대의 맨 아래 4분의 1가량만 차지해 폐소공포증을 유발할 것 같은 비좁은 지하 방공호에서 서너 개의 촛불만 밝혀놓은 흐릿한 조명 아래 배우 12명의 땀과 눈물만으로 끔찍한 전쟁의 참상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연극 ‘여행의 끝’의 제작자로 참여해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 무대에 올린 윤석화 씨. 그는 “이번 작품의 제작비가 5억 원이 안 된다. 국내 공연계도 과도한 제작비 거품을 빼야 한다”고 말했다. 런던=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자신들의 처지를 놓고 농담을 나누던 군인들이 전장으로 출동하기 전에 엄습하는 공포감에 떨고, 전우를 잃은 상실감과 죄책감에 울먹이다 끝내 부상을 입고 절규에 가까운 신음을 토해내면서 스러져 가는 모습에 관객들의 가슴은 먹먹해졌다. 폐부에서 터져 나오는 신음을 참다못해 뛰쳐나가는 관객도 있었다.
커튼콜에선 공연 도중 전사했던 배우들이 동상처럼 등장한 가운데 무대 3분의 2를 뒤덮었던 장막이 서서히 걷히면서 프랑스 전선에서 전사한 6만 명의 영국군 중 시체를 찾지 못한 수천 명의 명단이 펼쳐졌다. 관객들은 일제히 기립박수를 쳤다.
후반부 내내 울먹이던 윤 씨도 가장 먼저 일어나 박수를 쳤다. 그는 지난해 한국에서 자신이 제작하고 연출한 연극 ‘나는 너다’와 이 작품의 교환 공연을 추진 중이다. ‘나는 너다’는 애국자 안중근과 변절자로 낙인찍힌 그 아들 안준생의 삶을 대조시키면서 안중근이 결국 지키고자 했던 힘없고 불쌍한 이들이 곧 그의 아들과 같은 존재였음을 일깨운다.
윤 씨는 “두 작품 모두 ‘당신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란 것을 발견하고 전율을 느꼈다”고 말했다.
웨스트엔드에서 윤 씨의 활약은 이제 시작이다. 영국에서 1년째 체류 중인 그는 ‘에비타’ ‘라이언 킹’ ‘아이다’의 작사가로 유명한 팀 라이스가 제작 중인 뮤지컬 ‘지상에서 영원으로’(몽고메리 클리프트 주연의 동명 영화로 유명한 작품)의 프로듀서로도 참여하고 있다. 그는 “제가 제작 연출한 뮤지컬 ‘토요일 밤의 열기’ 비디오를 본 라이스가 ‘지상에서 영원으로’ 연출 제의를 해왔는데 제가 이곳의 제작 시스템을 모른다고 했더니 공동제작자 겸 예술감독을 제안했다”면서 “내년이나 내후년으로 공연 시기를 조율 중”이라고 밝혔다. 그는 자신이 세계 초연했던 영국 극작가 아널드 웨스커 원작의 모노드라마 ‘딸에게 보내는 편지’ 영어 공연도 추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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