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마애삼존불은 옛 백제 사람의 얼굴을 닮았다. 보리밥 알갱이처럼 둥근 볼에 서글서글한 웃음. 영락없는 마음씨 좋은 키다리아저씨이다. 가운데 석가부처는 체격이 당당한 장자풍이다. 언뜻 부잣집 맏며느리 같은 인상이다. 오른쪽 미륵부처 얼굴은 천진난만하다. 왼쪽 제화갈라보살 웃음도 티 없이 맑다. 세 분 얼굴 모두 통통하다. 보기만 해도 넉넉하다. 유쾌 상쾌 통쾌하다.
내포(內浦)는 ‘내륙 깊숙이 들어앉은 포구’를 말한다. 오늘날 태안, 서산, 당진, 홍성, 예산, 아산 등 가야산을 중심으로 열 고을이 바로 그곳이다. 아산만, 가로림만, 천수만에 연결된 하천을 통해 내륙 깊숙이까지 뱃길이 닿았다. 중국의 불교문화가 이곳을 통해 곧바로 백제에 밀려들었다. 태안마애삼존불, 서산마애삼존불, 예산화전리 사면석불 등이 바로 그 흔적이다. 당시 내포지역은 한반도의 불교문화 선진지역이었던 것이다.
서산 보원사(普願寺) 터는 서산마애삼존불과 가깝다. 걸어서 15분이면 충분하다. 산에 빙 둘러싸인 강당계곡 ‘너른 우묵 땅’이다. 장대한 당간지주와 5층 석탑이 남아 있다. 통일신라 때 화엄 10찰의 하나였다. 의상대사가 이끄는 화엄종은 통일신라의 통치이념이다. 수준 높은 내포지역의 백제 유민들은 웬만한 불교 종파에는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통일신라로선 우선 내포지역 백제 유민들의 마음부터 사로잡아야 했으리라.
보원사는 서산마애삼존석불 개심사 가야사 사이에 놓여 있다. 백제 사람들의 사랑을 받던 절집과 마애석불 사이에 통일신라가 새 절을 지은 것이다. 승려가 한때 1000명이 넘었다니 통일신라의 관심이 어땠는지 알 수 있다.
어쩌면 의상(625∼702)뿐만 아니라 원효대사(617∼686)도 이곳 보원사에 와서 설법했을 가능성이 크다. 가야산에 원효봉 원효대 원효암의 이름이 남아있는 것이 그 좋은 예다. 오죽했으면 진성여왕 7년(893년)에 당대의 석학 최치원(857∼?)까지 이곳 서산태수로 보냈을까. 그때까지도 이곳 사람들이 호락호락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당시 당진(唐津)은 통일신라와 당나라의 중요한 새 뱃길 루트였다.
발길 닿는 곳마다 옛 절터
보원사 터에서 개심사 가는 코스는 조붓한 오솔길이다. 솔바람이 솔솔 불어 살갗을 간질인다. 오른쪽 아래엔 해미읍성이 한눈에 보인다. 그 너머엔 바다가 있다. 산은 높지 않고 야트막하다. 파릇파릇 너른 들판이 둥근 구릉을 감싸고 있다. 너른 하천이 느릿느릿 흐른다. 이곳 사람들의 “그랬시유∼, 저랬시유∼” 할 때의 긴 “유∼” 발음이 떠오른다.
개심사(開心寺)는 ‘마음의 문을 여는 절집’이다. 소박하다. 심검당의 ‘구불퉁한 기둥’이 자연스럽다. 경허와 만공선사도 이곳 개심사에 자주 머물렀다. 그러다 한순간 경허는 온다간다 말도 없이 훌쩍 떠났다. 한손에 주장자, 등에 걸망 하나 메고, 구름처럼 바람처럼 떠돌았다.
제자 만공은 40여 년간 덕숭산 가야산 일대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스승 경허가 북한 삼수갑산에서 서당 훈장을 하다가 입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비승비속의 삶을 살다가 이름도 남김없이 눈을 감은 것이다.
‘착하기는 부처님보다 더하고/사납기는 호랑이보다 더했던 분, 경허 선사여!/천화하여 어느 곳으로 가셨나이까?/술에 취해 꽃 속에 누워 계십니까?’
내포 가야산은 발길 닿는 곳마다 옛 절터이다. 골짜기 평평한 곳이면 어김없이 빛바랜 주춧돌이 누워 있다. 아늑한 산기슭에도 기왓장 조각이 널려 있다. 탑이 놓였던 사각형 밑동만 덩그마니 남아있는 곳도 있다.
그렇다. 내포 땅엔 어디에나 돌미륵부처가 널려 있다. 길가에 배시시 웃으며 서 있다. 낡은 민가 귀퉁이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헌헌대장부 얼굴로 우뚝 서 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다. 누가 말 걸어주지 않아도 괜찮다. 그렇게 천년만년 산처럼 바다처럼 서 있다. 내포 땅 가야산은 그런 곳이다.
‘가야산의 으뜸 절집’ 가야사
서산 예산 홍성에 걸쳐 있는 가야산은 ‘내포의 꽃심’이다. 옛 백제인이 지상에 건설한 ‘부처님 나라’이다. 백제인의 꿈과 얼이 서려 있다. 골짜기마다 수많은 절과 탑이 있었다. 현재 확인된 옛 절터만도 얼추 100개가 넘는다. 발에 걸리는 게 기왓장과 도자기 조각이다.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에서 경주남산을 ‘절집들이 하늘의 별처럼 널려 있고, 탑들은 기러기 떼가 날아가는 것 같이 줄지어 있다(寺寺星張 塔塔雁行)’고 표현했다. 경주남산 40여 골짜기엔 절터 122곳, 돌부처 57개, 돌탑 64개, 왕릉 13곳, 고분 37곳이 남아 있다.
내포 가야산 절집과 탑들도 경주남산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대부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나같이 무성한 잡초와 나무에 묻혀 있다. 망한 나라 백제의 운명과 닮았다. ‘목 없는 불상’이나 무너진 탑조차 찾아볼 수 없다. 주춧돌 등 땅바닥의 흔적만 겨우 남아 있을 뿐이다.
내포 가야산은 천하명당이다. 수정봉(453m)-옥양봉(621m)-석문봉(653m)-가야봉(678m)-원효봉(677m)이 연꽃잎처럼 빙 둘러 있다. 연꽃 한가운데 꽃심이 바로 옛 가야사 터이다. 가야사는 가야산 100여 개의 절 가운데서도 ‘으뜸 절집’이었다. 하지만 1846년 흥선대원군이 이 절을 불태우고 그의 아버지 남연군(이구) 묘를 이장하는 바람에 졸지에 사라졌다. 대원군은 미안했던지 가야사 맞은편 기슭에 보덕사(報德寺)라는 작은 절을 지어줬다.
남연군 시신은 고려시대 나옹선사(1320∼1376)가 세웠다는 가야사 금탑자리에 묻혔다. ‘2대에 걸쳐 천자(天子)가 나온다’는 혈처이다. 실제 묘를 쓴 이후 대원군 후손 중에서 대한제국의 고종황제(재위 1863∼1907), 순종황제(재위 1907∼1910)가 나왔다. 풍수지리상으로 ‘석중지토혈(石中之土穴)의 명당’이라고 한다. ‘사방이 돌로 쌓여 있는데 시신이 묻힌 자리만 흙’이라는 것이다. 1868년 독일 상인 에른스트 오페르트는 남연군묘 도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무덤 주위에 돌이 워낙 많은 데다 관의 회벽이 두껍고 단단했기 때문이다.
가야산을 중심으로 북쪽엔 상왕산(307m), 남쪽엔 덕숭산(495m)이 있다. 상왕산엔 개심사, 덕숭산엔 수덕사가 자리 잡고 있다. 아무래도 꽃심 자리에 있던 가야사의 빈자리가 크게 보인다.
▼ ‘빈 거울’ 경허-‘텅 빈 충만’ 만공 스님의 법문 생생 ▼
1866년 5월 어느 날 해질녘. 두 탁발승이 홍성의 한 마을을 지나고 있었다. 텁석부리 수염의 한 스님은 체구가 건장했다. 걸음도 성큼성큼 앞서 걸었다. 뒤따르는 젊은 스님도 몸집은 큰 편이었지만 어딘지 선이 부드러웠다. 등에 걸머진 바랑은 두 스님 모두 불룩했다. 하루 탁발을 끝내고 절로 돌아가는 중이었던 것이다.
“스님, 좀 쉬었다가 가시지요. 바랑이 무겁고 다리가 아픕니다.” 젊은 스님이 말했다. 하지만 앞서 가던 스님은 들은 척 만 척 휘적휘적 갈 길을 갈 뿐이었다. 그때 마침 한 동네의 우물가에 다다랐다. 한 아낙네가 물동이를 이고 그들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갑자기 텁석부리 스님이 그 아낙네의 양 볼을 잡더니 ‘쭉∼’ 하고 입을 맞추었다. “에구머니나!” 아낙네가 질겁했다. 물동이가 “와장창 깨졌다. 주위 논에서 일하다가 이 장면을 본 농부들이 괭이나 몽둥이를 들고 달려왔다. 텁석부리 스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나는 듯이 도망쳤다. 젊은 스님도 죽자 살자 내뺄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갔을까. 뒤쫓던 사람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앞서 가던 텁석부리 스님이 멈춰 서더니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아직도 다리가 아프더냐? 등의 바랑이 무겁더냐?”
경허(鏡虛·1849∼1912)와 그의 제자 만공(滿空·1871∼1946) 스님의 일화다. 당시 그들은 서산 천장사에서 살고 있었다. ‘빈 거울’ 경허는 행동에 걸림이 없었다. 계율에 얽매이지 않았다. 음식도 술 고기 등 가리지 않았다. ‘텅 빈 충만’ 만공은 이런 스승을 깍듯이 모셨다. ‘일체 걸림이 없는 사람은 단번에 생사를 벗어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만공은 소박했다. 법문도 저잣거리 사람이 알 정도로 알기 쉬웠다. 거문고 타기를 즐기거나, 서울 부민관의 최승희 춤 구경을 갈 정도로 풍류를 알았다. 만해 한용운(1879∼1944)을 “내 애인”이라며 아낀 것이나, 한참 아래인 김좌진 장군(1889∼1930)과 팔씨름하며 허물없이 지낸 것도 소탈한 그의 성품을 잘 보여준다.
만공은 1945년 8월 16일 수덕사에서 광복 소식을 들었다. 그는 제자들 앞에서 무궁화 꽃송이에 먹물을 듬뿍 묻혀 한지에 ‘世界一花(세계일화)’라고 썼다. 그리고 말했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요, 이 나라 저 나라가 둘이 아니요, 이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이다. 머지않아 이 조선이 ‘세계일화’의 중심이 될 것이다. 지렁이 한 마리도 부처로 보고, 저 미웠던 왜놈들까지도 부처로 봐야 이 세상 모두가 편안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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