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기물명(器物銘)을 찾아서]“아홉번 반성하며 살자”… 베개에 새긴 삶의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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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7월 23일 03시 00분


가래나무로 만든 목침. 마름꽃 모양의 구멍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올 듯 하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가래나무로 만든 목침. 마름꽃 모양의 구멍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올 듯 하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서늘한 대자리에 누워 목침(木枕)에 턱을 괸 채 흘러가는 흰 구름을 바라본다. 가끔 이러고 싶을 때가 있다. 장마가 물러가고 연일 쾌청한 하늘이 펼쳐지고 있는 요즘은 더욱 그렇다. 햇살은 더할 나위 없이 투명하고 산뜻하다. 불쑥 ‘부석사의 능금은 참 행복하겠지?’ 하고 운을 띄웠더니 아내가 그냥 피식 웃는다.

저 햇살이 사과만을 익어가게 하지는 않으리라. 뙤약볕을 피해 마을 정자에 팔을 괴고 누워 계실 아버지는 아마 고추가 여무는 날씨라며 좋아하실 것이다. 그런데 나는 문득 ‘사람을 익어가게 하는 베개’가 떠올랐다. 베개에 기대 흰 구름을 바라보는 한가로운 정경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지만, 그 뒤에는 베개를 상대하는 문화의 차이가 고요히 흐른다.

○ 어떤 베개를 떠올리시나요?

“베개 하면 무엇이 떠오르느냐”고 다시 아내에게 물었다. 첫 번째 대답은 동침(同枕)이다. 잠자리를 같이한다는 뜻의 동침(同寢)이 아니라 부부가 나란히 베는 그런 베개를 말한다. 두 번째로는 연침(聯枕)이라 답했다. 친구들이 나란히 베는 베개를 연침이라 하는데, 베개가 둘이어도 좋고 하나이면 더 좋지 않으냐 한다. 더 물었다면 딸 쌍둥이의 포동포동한 허벅지 베개가 좋다 했을지 모르겠다.

세상의 수많은 베개가 지닌 공통점은 수면을 돕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누구에게 묻는가에 따라 답은 달라질 수 있다. 옛글을 자주 읽은 분께 여쭈면, 시원한 시냇물을 베개 삼아 눕는다는 ‘침류(枕流)’의 멋이나 팔베개를 한 채 편히 쉬는 ‘곡굉이침(曲肱而枕)’을 빼놓지 않을 듯싶다. 반면에 세상의 어머니들에게 묻는다면 약이 되는 베개, 곧 약침(藥枕)을 말하지 않을까? 국화 베개는 머리를 맑게 해주고, 녹두베개는 풍을 없애준다는 이야기가 나올 법하고, 도자기 배게는 눈을 맑게 해준다는 처방까지 해줄 듯하다.

○ 세상의 베개와 침명(枕銘)의 베개

그렇다. 세상의 베개들은 참으로 가지각색이다. 좁쌀 메밀 잣 국화 등을 넣어 만든 것, 부들이나 짚을 엮어 만든 것, 소나무 대추나무 고목뿌리를 잘라 만든 것, 돌 상아 도자기 크리스털 등을 소재로 한 것까지 재료 따라 다르고, 동그라미 네모 세모 사다리꼴 반달에서 동물 모양까지 그 생김새가 참으로 다채롭다. 학침(鶴枕) 모란침(牧丹枕) 연화침(蓮花枕)처럼 꽃과 동물을 그려 넣은 것들, 부(富)·귀(貴)·수(壽)·복(福) 등의 문자를 수놓은 것들도 있다. 부모 봉황과 일곱 마리의 새끼 봉황을 수놓은 구봉침(九鳳枕)은 부부의 소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베개다.

선인들의 문학 작품에도 베개가 종종 등장한다. ‘늙어갈수록 한가로운 정취가 많아져, 창가에서 목침 베고 태평시절을 꿈꾼다(老境漸多閒意味 一窓高枕夢羲皇)’라고 한 유성룡의 ‘복숭아나무 목침(書桃枕 庚子)’이 그 예다. ‘의서(醫書)에 이르기를, 무자일(戊子日)에 복숭아가지로 베개를 만들면 이목(耳目)이 총명해진다’고 적어둔 내용도 흥미롭다. 늙어갈수록 지키고 싶은 것이 총명함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또한 선인들의 붓 끝에 자주 올랐던 베개는 ‘침명(枕銘)’이 새겨진 베개다. 베개에 새겨두는 짤막한 운문이 침명인데, 이 침명을 가진 베개들은 대체로 소박한 목침들이었다. 굴목침(掘木枕·굽은 나무 베개), 도침(桃枕·복숭아나무 베개), 조목침(棗木枕·대추나무 베개)이 그런 유이다. 금강산이나 울릉도의 나무로 베개를 만든 사연, 혹은 아버지가 물려준 특별한 목침에 눈길이 미치기도 한다. 하지만 비단으로 감싼 화려한 베개가 침명에 초대된 예는 매우 드물다.

○ 사악함을 물리치는 청장관의 베개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를 남긴 18세기의 문인 청장관 이덕무에게도 특별한 베개가 하나 있었다. 서얼로 태어난 아픔을 이기고 문예의 절정에 도달했던 그는 어느 날 하늘이 내려준 베개와 인연을 맺었다. 우레와 번개가 치더니 하필 백년 묵은 대추나무가 꺾여 넘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는 얼른 이 대추나무를 잘라 목침을 만들고 ‘조목침명(棗木枕銘)’을 이렇게 새겼다.

“백년 묵은 대추나무에, 홀연 번개가 쳤다. 깎아서 베개를 만드니, 귀신도 두려워 떨리라. 귀신들이 떨지 않으면, 우레로 박살내리. 이 베개는 군자의 곁을 따르리라(古棗百年 疾雷擊 爲枕 鬼魅 匪鬼魅 雷擊 玆枕隨君子之側)”

하늘의 신령스러움을 빌려 꿈자리에서까지 사악함을 물리치는 꼿꼿한 베개가 청장관의 베개인 셈이다.

침명에는 ‘구성침(九省枕)’처럼 아홉 번을 반성하자는 뜻을 담은 것도 있고, 군자가 베고 잘 것은 부귀영화가 아니라 선(善)과 인(仁)이 아니겠느냐는 목소리도 들어 있다. 짤막하고 강렬한 다짐들은 마치 저 강렬한 햇살과도 같다. 가을이면 부석사의 사과는 속살까지 빨갛게 익을 것이다.

김동준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 조교수 djk2146@ewh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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