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한수산의 동토의 민들레, 사할린 동포]<2>유족과 함께 돌아본 아픈 삶의 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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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8월 2일 03시 00분


비석 없는 묘 어찌 찾나… 그저 아버지 살던 집 흙 한줌 담아가오

오선환 씨가 생전 얼굴도 보지 못한 아버지가 살았던 집 마당의 흙을 파내 담고 있다. 어머니의 묘소에 뿌리기 위해서다. 끝내 아버지의 묘를 확인하지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던 오 씨에게도, 신윤순 씨에게도, 그리고 그들 뒤를 따라가던 작가에게도 그 시간은 견디기 힘든 아픔이었다. 한수산 씨 제공
오선환 씨가 생전 얼굴도 보지 못한 아버지가 살았던 집 마당의 흙을 파내 담고 있다. 어머니의 묘소에 뿌리기 위해서다. 끝내 아버지의 묘를 확인하지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던 오 씨에게도, 신윤순 씨에게도, 그리고 그들 뒤를 따라가던 작가에게도 그 시간은 견디기 힘든 아픔이었다. 한수산 씨 제공
《 동토의 땅 사할린에 끌려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의 흔적을 찾으러 아들, 딸이 나섰다. 고국에 두고 온 아내와 자식을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올애비(홀아비)’로 산 그들은 그대로 사라져갔다.

작가 한수산의 ‘동토의 민들레, 사할린 동포’ 2회를 8면에 싣는다. 유족들은 희미한 아버지의 흔적을 더듬지만 이들을 맞이하는 것은 세월에 허물어진 집들뿐이다. 묘소도, 묘비도 확인할 길이 없는 아들은 아버지가 밟았을지도 모르는 마당의 흙 한 줌을 한국으로 가져간다. 어머니의 묘에 뿌리기 위해서다. 아들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
지난달 14일 사할린 강제징용자 유족 오선환(71), 신윤순 씨(67)가 사할린으로 떠났다. 사할린으로 끌려가 광복 후에도 돌아오기는커녕 소식조차 끊긴 채 반세기를 훌쩍 넘겨버린 아버지의 족적을 더듬고 유해라도 찾기 위해서였다. 아버지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자식을 껴안고 두 어머니는 남편을 기다리며 가난의 질곡 속에서 살아야 했다.

돌린스크 시에서 발행한 아버지 오맹근의 1973년 사망증명서와 사진 한 장, 그것이 오선환 씨가 가진 전부였다. 1950년 소인이 찍힌 아버지 신완철의 편지 겉봉투의 주소 하나, 그것이 신윤순 씨가 가진 전부였다. 두 살이었던 아들, 배 속에 있던 딸도 아버지를 찾아가는 지금엔 어느새 71세와 67세가 되었다.

사할린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 우리는 체류허가를 대행해줄 ‘이산가족회’에 들러 여권을 맡겨야 했다. 사할린에서는 단 며칠을 머물러도 체류허가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유족들은 마음이 급했다. 이산가족회 박순옥 회장에게 여권을 맡기면서도 그들은 아버지를 찾아온 각자의 사연을 풀어놓았다. 웃음기 없는 얼굴로 내내 사연을 듣고만 있던 박 회장이 오선환 씨가 내민 사망증명원을 살펴보다가 성큼 일어섰다. ‘몇십 년인데…. 그래도, 가 봅시다!’

건물 뒤 주차장에서 차를 몰고 나온 박 회장이 문서관리소로 향하며 처음으로 웃었다. 그때가 11시 45분이었다. 전연 예상하지도 못했던 일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유즈노사할린스크 시청을 찾아가 문서보관소 3층 복도에서 기다리기를 30여 분, 밖으로 나온 박 회장이 한인동포 특유의 토막 난 한국말로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이대식. 아버지 장례를 치른 사람이 이대식. 주소는 돌린스크.’ 약 40년 전에 장례를 치른 사람의 이름과 주소까지 찾아내다니. 러시아 문서관리의 철저함에 소름이 돋았다.

돌린스크로 향하는 길은 대자연의 숲과 초원의 한가운데로 뚫려 있었다. 창밖을 바라보며 오 씨가 말했다. ‘한국이나 사할린이나 구름은 같은 구름이네, 저 구름을 보며 아버지는 얼마나 고향에 오고 싶어 했을까.’

오 씨의 아버지가 망향의 한을 품은 채 살았던 집. 지금은 돌보는 사람이 없어 폐가가 됐다.
오 씨의 아버지가 망향의 한을 품은 채 살았던 집. 지금은 돌보는 사람이 없어 폐가가 됐다.
21세에 홀로 된 그의 어머니는 누이마저 홍역으로 세상을 떠나자 자기 하나를 기르며 사셨다고 했다. 국어교사였던 그는 상주중학교 교감으로 정년을 맞았다. 아버지의 소재를 탐문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 당시 자신의 두 달 봉급이 넘는 돈을 주고 사할린 동포에게 부탁을 해서 구한 것이 지금 가지고 있는 한 장의 사망증명원과 사진이었다.

돌린스크 시청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2시였다. 두 사람이 갖고 온 자료를 가지고 담당자를 만난 박 회장이 직원과 함께 문서보관 창고와 사무실을 오가기 시작했다.

지루한 기다림이 한 시간쯤 계속됐을 때 박 회장이 밖으로 나왔다. 희망과 실망이 한순간 날줄과 씨줄이 되어 뒤엉켰다. ‘1946년부터 2003년까지의 사망자 가운데 한인으로 추정되는, 생년월일이 다른 신 씨 4명을 찾아냈지만 신윤순 씨의 아버지 신완철은 이곳에 없다. 오맹근의 사망신고를 하고 장례를 치른 이대식은 1994년 11월 사망했고, 그 부인이 파그로브 가에 살아 있다…’ 는 것이었다.

기대와 다른 얘기에 우리는 서로 눈길을 마주치지 못하며 말없이 차에 올랐다. 어디론가 달리기를 30여 분, 차를 세운 곳은 또 다른 관공서 앞이었다. 여기가 어디냐고 묻자 박 회장이 말했다. ‘파그로브 가입니다. 우리 지금 이대식 씨 집 찾아갑니다.’ 주민센터만 한 건물 2층으로 몰려 올라가자 러시아인 여직원은 대뜸 우리를 데리고 밖으로 나서며 사무실 문을 잠갔다. 이미 박 회장의 전화를 받은 여직원이 이대식 씨 집까지 동행한다는 것이었다.

허름하고 낡은 아파트. 이대식 씨 부인이 사는 집은 비어 있었다. 10여 분 뒤, 머리가 하얀 할머니가 건강한 걸음걸이로 나타났다. 이대식 씨 부인 김순희 씨였다. 자신은 한국으로 영주 귀국했는데 사흘 전 춘천의 요양소에서 딸을 보러 돌아왔다고 했다.

다시 차에 올라 파그로브 가 공동묘지로 향했다. 남편이 장례를 치러준 것으로 아는데, 묘비 같은 것은 없다던 이대식 씨 부인의 말이 가슴에 돌이 되어 얹혔다. 흙먼지가 이는 길을 달려 묘지 앞에서 내렸다. 어제 찾아갔던 유즈노사할린스크 공동묘지와 다른 것이 있다면 길을 사이에 두고 왼쪽이 러시아인 묘역, 오른쪽이 한인묘역이라는 점이었다. 한인묘지가 절반이라면 사할린으로 끌려온 한인이 얼마나 많이 이 지역에 살았다는 것인가. 1970년대에 묻힌 묘지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이분들 대부분이 1910년에서 20년대에 태어났으니 다들 예순을 못 넘기고 세상을 떠난 것이 된다.

오선환 씨(왼쪽)가 신윤순 씨와 함께 아버지가 묻혔다는 묘역을 살펴보고 있다. 그러나 아버지의 묘소도 묘비도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었다.
오선환 씨(왼쪽)가 신윤순 씨와 함께 아버지가 묻혔다는 묘역을 살펴보고 있다. 그러나 아버지의 묘소도 묘비도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었다.
비석도 없는 묘를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오선환 씨가 사라진 숲 속을 바라보았다. 그가 걸어 들어간 묘역 밑쪽은 늪지대로 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유치원 근무를 마친 이대식 씨의 딸 이명자 씨가 우리를 찾아 묘지까지 온 것은 햇살이 기울기 시작할 때였다. 오선환 씨가 아버지의 사진을 내밀자 명자 씨는 놀랍게도 ‘어렸을 때 본 기억이 있는 것 같다’는 게 아닌가. 살던 집도 아직 그대로 있다며 명자 씨가 말을 이었다. ‘올애비들 여럿이 모여 살았습니다.’ 그녀가 말한 ‘올애비’란 홀아비를 뜻했다.

오 씨의 아버지가 살던 곳은 묘지에서 멀지 않은 소스노브 가라는 농촌마을이었다. 집은 지금 폐가가 되어 있었다. 마당 가득 키를 넘겨 자란 풀을 헤집고 들어가 허물어진 집안을 둘러보고 난 뒤 오선환 씨가 마당 한구석의 흙을 파기 시작했다. 한국으로 가지고 돌아가 어머니 묘에 뿌릴 흙이었다.

사할린에서 결혼을 하지 않고 산 사람들은 언젠가는 조국으로 갈 것을 믿고, 두고 온 아내와 자식을 만날 그날을 기다리고 기다렸던 사람들이다. 그들을 여기서는 ‘올애비’라고 불렀다.

그들은 술을 많이 마셨다고 했다. 그랬으리라. 순결함이란 무엇인가. 고통의 담금질 속에서 그리움만으로 그렇게 살다, 묘비도 없이 이국땅에 묻힌 그들의 삶이 ‘술에 절어 있었다’해도 어찌 순결하지 않은가. 그러나 작은 봉분이 되어 땅에 묻힌 그들의 자취는 세월과 함께 사라지고, 나무뿌리가 그들의 뼈를 감싸면서 흙이 되어 갔으리라.

아버지의 유해 대신 당신이 밟았을 마당의 흙 한줌을 파들고 돌아서는 오선환 씨의 뒷모습에 저녁 빛이 어리고 있었다.

‘저 세상에 가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만날 때, 어머니, 제가 할 일은 다 하고 왔습니다 하는 그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왔던 겁니다.’ 비로소 그의 입술이 떨리며 울음이 터져 나왔다. 아버지를 찾아간 긴 여정은 기억의 모자이크였다. 망각의 늪을 건너 시간을 역류해간 긴 하루가 끝나고 있었다.  
▼ 한인들 왜 귀환못했나 ▼
강제노역 끌고간 日 패전뒤 그대로 방치… 美군정당국도 소극적


1945년 8월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연합국 점령지구에서 주민들에 대한 자국 귀환 조치가 이루어졌지만 소련 점령지구에서는 귀환이 매우 늦게 진행됐다. 1946년 12월에 체결된 ‘소련지구송환 미-소 협정’에 따라 총 29만2590명의 일본인이 사할린에서 일본으로 귀환했다. 일본에 의해 사할린으로 끌려와 가혹한 강제노역에 처해졌던 한인들도 당연히 송환될 것으로 믿었지만 일본은 ‘더는 일본인이 아니다’라는 이유로 한인들을 귀환 대상에서 제외시켜 버렸다.

수많은 한인은 사할린 남단에 위치한 코르사코프 항구로 몰려들어 자신을 조국으로 데려다 줄 귀국선을 하염없이 기다렸지만 끝내 배는 오지 않았다. 소수민족인 아이누족 일본인은 물론이고 중국인도 자국으로 돌아갔지만 한인들만 끝내 귀환에서 제외되었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때 대한민국은 정부 수립 이전인 미군정 시기여서 이들을 보호할 외교적 보호권이 없는 상황이었다. 또 남한에서의 질서유지를 중요한 과제로 여긴 미군정 당국은 재외 한인의 귀환에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어 1956년 10월 19일, 일본과 소련이 국교 회복에 합의하고 ‘일-소 공동선언’을 발표하면서 한인과 결혼한 일본인 아내에 대한 귀환이 이루어진다. 1957년 8월부터 1959년 9월까지 7차에 걸쳐 766명의 일본인 아내와 1541명의 한인 남편 및 자식들이 일본으로 귀환했다. 그 뒤 끝내 일본으로도, 조국인 한국으로도 돌아가지 못하고 사할린에 남게 된 한인은 4만3000여 명으로 추산된다.

1952년 이후 소련 당국은 소련 국적 취득을 공식적으로 허가했으나 사할린에 남아야 했던 한인 대부분은 소련 국적을 취득하지 않았다.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가리라는 신념 때문이었다. ‘소련영역 내 거주하는 자로서 소련 국적을 스스로 입증하지 못하는 자는 무국적자로 간주한다’는 소련 국적법에 따라 무국적 상태가 된 한인들은 이동과 거주의 자유도 제한당한 채 살아야 했다.

이들 가운데 고향에 아내와 자식을 둔 사람들은 재혼하지 않은 채 몇 명씩 모여 집단생활을 했다. 이들을 현지에서는 ‘올애비’로 불렀다.  

한수산 작가·세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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