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건달’은 간 데 없고…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8월 9일 03시 00분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
무대★★★☆ 노래★★★☆ 연기★★★ 연출★★★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에서 최고의 도박꾼 스카이(김무열·가운데)가 곤경에 처한 선교사 사라를 돕기 위해 ’행운의 여신이여, 나에게 깃들라’라는 뜻의 ‘럭 비 어 레이디’를 부르며 다른 도박사들과 건곤일척의 주사위게임을 펼치는 하이라이트 장면. 이 장면의 남성 군무가 일품이다. CJ E&M 제공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에서 최고의 도박꾼 스카이(김무열·가운데)가 곤경에 처한 선교사 사라를 돕기 위해 ’행운의 여신이여, 나에게 깃들라’라는 뜻의 ‘럭 비 어 레이디’를 부르며 다른 도박사들과 건곤일척의 주사위게임을 펼치는 하이라이트 장면. 이 장면의 남성 군무가 일품이다. CJ E&M 제공
‘아가씨와 건달들’은 6·25전쟁이 발발하던 해(1950년)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첫선을 보인 뮤지컬이다. 국내에는 말런 브랜도와 진 시먼스 주연의 영화(1955년)로 먼저 알려졌고 첫 무대 공연은 1983년 대중 민중 광장 3개 극단의 연합공연으로 이뤄졌다. 전쟁의 풍파를 겪은 한국에서 이 뮤지컬을 받아들이는 데 한 세대가 걸린 것이다.

하지만 이후 다시 한 세대가 지나는 시간 동안 이 작품은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뮤지컬 중 하나가 됐다. 초연 이후 28년간 17번이나 재연되면서 국내 뮤지컬 붐 조성에 일등공신이 됐다.

비단 한국만의 상황은 아니다. 이 작품은 브로드웨이에서도 1976년, 1992년, 2009년 세 차례나 리메이크됐고 토니 상을 9개나 휩쓴 인기작이다. 한마디로 클래식 반열에 오른 뮤지컬이란 소리다.

뉴욕 뒷골목 도박꾼과 쇼걸 그리고 다소 시대착오적인 구세군 선교사 아가씨가 등장하는 이 작품이 어떻게 두 세대가 넘는 인기를 누리고 있는 걸까. 주인공들의 고민이 고스란히 지금 세대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현대성을 먼저 꼽을 수 있다.

이 뮤지컬의 주인공들은 전형적인 도시남녀다. 연하의 도박꾼 네이슨과 14년째 약혼 상태인 연상의 쇼걸 애들레이드는 1990년대를 풍미한 ‘015B’의 유행가 ‘아주 오래된 연인들’의 주인공이자 요즘 유행하는 연상연하 커플의 원형이다.

여자를 자신이 원할 때 언제나 얻을 수 있는 소비품으로 취급하는 또 다른 도박사 스카이는 ‘나쁜 남자’의 전형이다. 그런 ‘죄인’들을 구원하려다 마음을 뺏기는 선교사 사라는 영상매체가 ‘헐벗은 여배우’들을 비출 때는 ‘성의 상품화’를 소리 높여 비난하다가도 ‘헐벗은 남배우’ 앞에선 환호성 지르기에 바쁜 현대여성을 연상시킨다.

연출가 이지나 씨는 바로 이런 동시대성에 초점을 맞췄다. 원작에선 코맹맹이 소리를 내는 애교덩어리 애들레이드를 야성적 쿠거(어린 남자만 노리는 연상녀를 칭하는 미국 속어)에 가깝게 변신시켰다. 김영주와 옥주현이 연기하는 애들레이드는 실제 연하인 진구와 이율이 연기하는 네이슨이 가수 이승기의 히트곡 가사 ‘누난 내 여자라니까’에 해당할 대사와 노랫말을 토해낼 때마다 사족을 못 쓴다.

또 그동안 엄격한 청교도주의자로 그려졌던 사라도 본래 ‘뜨거운 피’를 지닌 당돌한 여자로 그려졌다. 그동안 화려하고 당찬 배역을 주로 맡아왔던 정선아는 청순한 사라가 아니라 자신에게 익숙한 ‘철부지 공주’ 이미지의 사라를 연기했다. 갖고 싶은 인형(스카이)은 어떻게든 차지해야 직성이 풀리는 적극적 여성이다.

하지만 이렇게 아가씨들이 ‘빅 마마’화하면서 반대로 건달들은 ‘꽃미남’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길들지 않는 악동 같던 네이슨은 ‘솜털 박힌 오이소박이’가 됐고, ‘옴 파탈’ 분위기 물씬하던 스카이(김무열·이용우)는 기껏해야 ‘까도남’(까칠한 도시 남자) 정도로 순치됐다.

이 작품의 원제는 ‘Guys and Dolls’다. 여기서 Dolls는 ‘인형 같은 여자’를 뜻한다. 하지만 이번 공연에서 Dolls는 ‘여자들의 꼭두각시가 된 남자’에 더 가까울 것 같다. 그로 인해 ‘Girls and Dolls’라는 제목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전체적으로 군무의 힘도 떨어졌다. 가장 아쉬운 점은 애들레이드와 사라, 네이슨과 스카이의 캐릭터가 서로 유사해지면서 변별력을 상실한 점이다. 그로 인해 네 개의 기둥이 빚어내는 극의 입체성이 무너졌다. 그 와중에서 가장 원숙한 김영주의 애들레이드와 가장 풋풋한 이율의 네이슨 그리고 발성과 연기 모두 안정적인 김무열의 스카이는 빛을 발했다.

음미할 만한 참신한 시도도 눈에 띈다. 사랑의 포로가 돼 도박을 포기했던 네이슨과 스카이가 부인들 몰래 다시 도박을 펼치는 커튼 콜 장면이 그렇다. 여자들이 결코 평범하지 않은 그들과 사랑에 빠진 진짜 이유야말로 바로 그렇게 길들일 수 없는 야성미에 매혹됐기 때문이라는 사랑의 역설을 제대로 담아냈기 때문이다. 16인조 오케스트라를 무대 위 2층 높이에 배치해 ‘보이는 음악’을 빚어낸 무대디자인과 대공황을 앞둔 1929년 미국의 상황을 2011년 한국의 상황에 맞게 대폭 의역한 대본도 그러하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i: 9월 18일까지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 5만∼13만 원. 02-2005-0114, 02-501-7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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