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日 철도침목 한개는 조선인 한사람의 목숨”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8월 13일 03시 00분


◇한국사 100년의 기억을 찾아 일본을 걷다/이재갑 지음/344쪽·1만4800원·살림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조선인의 묘입니다.”

일본 규슈(九州) 후쿠오카(福岡)에서 조선인 강제징용 고발 시민단체 활동에 평생을 매달리고 있는 배동록 씨가 자신의 키보다 두 배 이상 커 보이는 풀을 손으로 젖히며 안내했다. 그런데 묘지나 비석처럼 보이는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발목 높이로 붉은색이 도는 검은 돌 하나가 전부였다. 그의 설명이 없었더라면 일반 돌과 구분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배 씨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준비해 간 막걸리를 ‘묘’ 위에 뿌리면서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사람들의 ‘신세타령가’를 한 곡조 뽑았다.

아는 자에게는 보이는 법이고 모르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법이다. 강제징용에 관한 역사가 꼭 그렇다. 일본을 여행하고 온 사람들은 한결같이 일본 도시와 시골의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을 칭찬한다. 멋진 자연 풍광은 또 얼마나 볼만한가.

다큐멘터리 사진작가인 저자는 그러나 일본 곳곳에 서려 있는 강제 징용자들의 한(恨)과 역사를 알고 나면 철도에 놓인 침목 하나가 징용자 한 사람의 생명처럼 보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1996년 2월 한국 내 일본 잔재 중 근대 건축물을 찾는 작업을 시작한 것을 계기로 일본 내 조선인 강제징용과 관련된 건축물을 찾는 작업도 하게 됐다. 15년간 후쿠오카를 비롯해 나가사키 히로시마 오사카 오키나와의 탄광과 댐, 비행장, 통신시설, 군대 진지 등 80여 곳을 답사하며 찍은 사진과 재일동포와 일본인들의 현지 활동 이야기를 모아 책으로 엮었다.

배 씨가 안내했던 곳은 후쿠오카 현 지쿠호(筑豊) 지방의 다다구마 탄광에서 강제 노역으로 숨진 이들이 잠들어 있는 무연고 묘지다. 강제징용된 조선인들은 광산에서 사고로 목숨을 잃더라도 장례식을 치르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밤늦은 시간 동료들이 불에 타고 남은 유골을 수습해 일본인 묘지 근처에 몰래 묻고 폐광석으로 묘비를 대신했다. 조선인의 묘지라는 게 알려지면 가만두지 않기 때문에 묘비도 세우지 못했다.

일본 야마구치 현 우베 시에 있는 해저탄광. 1942년 2월 침수사고로 이 해저갱도에서 강제징용 조선인 134명을 포함해 183명이 산 채로 수장됐다. 사건 직후 보도 통제로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탄광은 폐광됐다. 위험하다는 이유로 유해 발굴 허가가 나오지 않아 유해는 아직도 차가운 바닷물 속에 있다. 살림 제공(위), 강제징용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오키나와의 ‘한(恨)의 비’.(아래 왼쪽), 단바 망간기념관에 있는 망간 채취 모형.(아래 오른쪽)
일본 야마구치 현 우베 시에 있는 해저탄광. 1942년 2월 침수사고로 이 해저갱도에서 강제징용 조선인 134명을 포함해 183명이 산 채로 수장됐다. 사건 직후 보도 통제로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탄광은 폐광됐다. 위험하다는 이유로 유해 발굴 허가가 나오지 않아 유해는 아직도 차가운 바닷물 속에 있다. 살림 제공(위), 강제징용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오키나와의 ‘한(恨)의 비’.(아래 왼쪽), 단바 망간기념관에 있는 망간 채취 모형.(아래 오른쪽)
다가와(田川) 지방의 ‘휴가’ 묘지에는 애견이나 애완 고양이의 묘비도 작게나마 꾸며져 있지만 조선인의 묘지는 묘비를 대신하는 돌멩이로만 겨우 알아볼 수 있는 처지에 있다.

지쿠호 지방은 일본 석탄 생산량의 40∼50%를 담당했을 정도로 일본 최대 탄광촌이었다.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은 이곳뿐만 아니라 일본 곳곳에서 폭행과 폭언에 시달리며 동물과 다를 바 없는 취급을 받았다. 일제는 자본가가 나야(納屋·헛간)에 노동자를 재우며 착취한 ‘나야 제도’를 통해 노예노동으로 조선인을 내몰았다.

갱도의 가장 깊숙하면서 위험한 곳에서 일했던 조선인 징용자들은 사고 위험에도 그대로 노출됐다.

1936년 1월 후쿠오카 현 게이센 정에 위치한 요시쿠마 탄광에서 발생한 화재 때 탄광 측은 화재가 커질 것을 우려해 노동자들이 미처 대피하기도 전에 갱도 입구를 점토로 막아 버렸다. 화재 발생 후 3일이 지나 갱도 입구를 열어보니 손톱이 다 벗겨진 광원들이 겹쳐진 채로 죽어 있었다. 조선인 25명과 일본인 4명 등 모두 29명이 사망했다. 요시쿠마 탄광은 전 일본 총리 아소 다로의 증조부가 세웠던 아소 광업 주식회사 소속 9개 탄광 중 하나다.

야마구치(山口) 현 우베(宇部) 시의 해저탄광에서는 1942년 2월 3일 침수사고 때 183명의 광원이 수장됐다. 이 중 134명이 조선인 강제징용자였다. 아직도 유해는 수장된 채 방치돼 있다.

저자는 나가사키 항구에서 서남쪽으로 19km 떨어진 곳에 있는 섬 하시마(瑞島)도 찾았다. 해저탄광 시설인 이곳은 멀리서 보면 섬 전체 모습이 군함과 같다고 해서 군칸지마(軍艦島)라는 별명을 얻었다. 태평양전쟁 말기에 이곳에서 강제 동원된 조선인과 중국인은 지옥 같은 노동에 시달려 ‘지옥섬’이라고 불렀다.

오사카에서는 비행장 건설을 위해 강제 동원됐다가 조선인 거주 마을이 된 우토로, 일본 육군이 저장고로 활용하기 위해 조선인 3500여 명을 동원해 만들었던 ‘다치소 터널’ 등을 찾았다. 1인용 토굴을 파고 저항했던 오키나와의 도카시키 섬에서는 조선인 위안부들이 그 좁은 토굴에 함께 있었다는 얘기를 듣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는 감상을 적고 있다.

저자는 재일 사학자인 박경식 씨의 자료를 소개하며 강제징용의 전반적인 규모를 이렇게 전했다.

“일본은 1939년부터 1945년에만 약 100만 명이 넘는 우리 동포를 강제 연행했고, 군속으로 37만 명을 전선에 동원했다. 조선 국내에서 동원한 485만 명과 합하면 실제로 6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연행된 셈이다.”

희망도 함께 기록하고 있다. 그를 강제징용 조선인의 묘지나 관련 현장으로 안내한 사람 중에는 양심 있는 일본인도 많았다. 저자는 지쿠호 지방의 ‘조선인 강제 연행을 생각하는 모임’의 회장인 오노 세쓰코 씨를 비롯한 뜻있는 일본인과 재일동포가 아소 탄광에서 희생된 이를 추모하는 추모비를 세웠고, 매년 추모제가 이어지고 있었다는 사실 등을 소개하며 “한국인으로서 부끄러우면서 고마운 마음이 교차했다”고 적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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