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옷 입은 셰익스피어 희극… 셰익스피어 고향 英도 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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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8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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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페스트’에서 신라 자비왕 일행의 배에 불이 난 상황을 배우들이 강렬한 붉은 부채춤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날의 뜻 깊은 공연에는 추규호 주영대사와 원용기 주영 한국문화원장도 함께 했다. 에든버러 국제페스티벌 제공
‘템페스트’에서 신라 자비왕 일행의 배에 불이 난 상황을 배우들이 강렬한 붉은 부채춤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날의 뜻 깊은 공연에는 추규호 주영대사와 원용기 주영 한국문화원장도 함께 했다. 에든버러 국제페스티벌 제공
영국 에든버러가 13일 밤 한국의 신비한 도술(道術)에 취했다. 한국의 해학적 무대 미학으로 객석을 사로잡은 극단 목화의 연극 ‘템페스트’로 인해서다.

한국 연극으로는 처음 에든버러 페스티벌에 공식 초청돼 시내 킹스시어터에서 개막한 이 작품은 영국인들에게 너무도 익숙한 셰익스피어의 텍스트를 한국적 전통으로 풀어냈다. 마술로 폭풍우를 불러일으키는 첫 장면부터 극은 관객을 매료했다. 2층 발코니 좌우에 포진한 5인조 국악밴드의 강렬한 반주와 푸른 조명 속에 소복을 입고 등장한 배우들은 거센 파도에 흔들리는 일엽편주의 위기상황을 긴 천을 휘날리는 힘찬 군무로 풀어냈다. 이어 그 배에 불이 붙은 설상가상의 상황을 이번엔 붉은 부채춤으로 형상화했다.

숨죽이며 지켜보던 관객들은 동양의 전설 같은 이야기에 셰익스피어의 이야기가 수놓아졌음을 발견하고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원작은 밀라노를 다스리던 주인공 프로스페로가 나폴리 국왕과 결탁한 동생의 음모에 빠져 딸 미란다와 함께 절해고도에 유폐된 뒤 12년간 익힌 마법으로 복수에 나서지만 나폴리 왕자와 미란다의 결혼으로 용서와 화해를 이룬다는 내용.

극단 목화의 오태석 예술감독은 이 드라마의 배경을 5세기 가야와 신라가 지배하던 한국 남해안 섬으로 이동시켰다. 프로스페로는 가락국의 지지왕(송영광)으로, 나폴리왕 알론조는 신라 20대왕인 자비왕(정진각)으로 변신한다.

역사적 배경만 한국화한 것이 아니다. 프로스페로의 충복인 요정 에어리얼은 한국 무속신앙에서 액막이 때 쓰는 인형인 제웅(이수미)이 되고, 그 명을 수행하는 공기의 요정들은 몽당빗자루만 남겨놓고 사라지는 허재비(허수아비의 경상도 사투리)들로 등장한다. 제웅과 허재비들은 사람은 물론이고 원숭이 오리 호랑이로 해학적 변신을 거듭하며 자비왕 일행을 희롱한다. 관객들은 환상적 존재인 요정을 인간과 친숙한 존재로 형상화한 점에 큰 호응을 보였다.

이런 둔갑술은 제국주의적 시각의 산물로 비판받는 칼리반의 형상화에서 절정을 이뤘다. 칼리반은 섬의 원주민으로 외모뿐 아니라 마음까지 노예근성에 물든 인물. 오 감독은 이 칼리반을 두 개의 머리로 나뉘어 말싸움만 하는 쌍두아(조은아 이승현)로 형상화하면서 한국적인 상생의 미학을 펼쳐냈다.

1층과 2층 700여 석이 거의 꽉 찬 객석에서는 “러블리(사랑스럽다)” “매지컬(마술적이다)”이라는 감탄이 이어졌다. 지지왕이 관객들에게 직접 말을 거는 마지막 장면에서 열렬한 환호가 쏟아지면서 공연이 1분 넘게 멈췄고 커튼콜 때는 1층 객석 3분의 1가량이 기립박수로 화답했다.

에든버러 페스티벌의 조너선 밀스 예술감독은 “용서와 화해의 드라마를 셰익스피어의 시적 운율을 살리면서도 코믹함을 잃지 않고 더 풍성하게 그려냈다. 이번에 초청된 아시아 작품들의 모범”이라고 격찬했다.

극단 목화의 ‘템페스트’는 16일까지 세 차례 더 공연된다. 함께 공식 초청된 안은미무용단의 ‘프린세스 바리’는 19∼21일 에든버러 플레이하우스에서, 정명훈 씨가 이끄는 서울시향 연주회는 24일 어셔홀에서 열린다.
▼ “분단의 증오 씻는 화해의 굿판”… 오태석 감독 인터뷰 ▼

“템페스트는 미움을 사랑으로 바꾸는 마법의 연극입니다. 처음엔 복수로 시작하지만 유쾌한 용서로 마무리합니다. 저는 이를 분단의 세월 속에 각박해지는 우리들(한국인들)의 이야기로 바꿔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오태석 씨(사진)는 13일 밤 첫 공연을 마치고 난 뒤 동아일보와 가진 단독 인터뷰에서 “이 연극은 셰익스피어의 한국화만 겨냥한 것이 아니라 분열과 증오로 멍든 한국인들에게 용서와 화해의 위대함을 일깨우고 싶은 마음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 작품은 외딴 섬에서 과거의 원한을 씻고 미래의 화해를 불러내는 한판 굿판을 닮았습니다. 영국 관객들에게 원작의 묘미를 새롭게 일깨워주는 동시에 미움의 악순환을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의 마음을 치유해줬으면 하는 마음도 담았습니다.”

칼리반을 두 개의 머리가 계속 입씨름을 펼치는 쌍두아로 표현한 것 역시 한국의 분단현실을 염두에 둔 ‘시적 장치’였다고 설명했다. 쌍두아의 몸을 둘로 갈라주는 것도 분단의 고착화가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고 형제애를 찾아가는 과정으로 풀어냈다는 설명이다.

특히 그는 이번 공연에서 셰익스피어의 유장한 대사를 우리말이 지닌 생략과 압축의 미학으로 담아냈는데 관객들이 이를 알아봐 준 것이 가장 흡족하다고 말했다.

에든버러=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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