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는 齊(제)나라 宣王(선왕)이 병문안을 했다는 말을 듣고도 대부 景子, 곧 景丑氏(경추씨)의 집으로 갔다. 그러자 경추씨는 맹자가 군주를 恭敬(공경)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그런데 맹자는 제나라 신하들이 仁義(인의)가 훌륭함을 인정하면서도 제나라 왕이 그럴 만한 상대가 아니라 여겨 왕에게 인의를 말하지 않는 것이라면, 이것이야말로 크나큰 불경이라고 했다. 이에 비해 자신은 왕 앞에서 인의를 늘 開陳(개진)하고 있으니, 제나라에는 나만큼 왕을 공경하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다고 했다. 경추씨는 자신이 말한 공경의 문제는 그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禮曰의 禮는 儀禮(의례)나 禮記(예기)처럼 예에 관해 기록한 옛 책을 가리킨다. 諾은 느릿느릿 대답하는 것으로, 짧게 얼른 대답하는 唯(유)와 구별된다. 不俟駕는 말에 멍에 매기까지 기다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不俟車라 하면 수레에 멍에 매기까지 기다리지 않는다는 말인데, 뜻은 같다. 경추씨가 말한 예의 가르침은 ‘예기’ ‘玉藻(옥조)’편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논어’ ‘鄕黨(향당)’편에도 나온다. ‘옥조’편에서는 ‘군주가 명하여 부르시거든 관청에 있을 때는 신 신기를 기다리지 않고, 밖에 있을 때는 수레에 멍에 매기까지 기다리지 않는다’고 했다. 固는 ‘본디’이다. 聞王命而遂不果는 맹자가 본디 조정에 나가려고 했다가, 왕이 조정으로 나와 달라고 명하자 끝내 조정에 가지 않은 사실을 말한다. 宜는 청나라 王念孫(왕념손)에 따르면 ‘거의 아마도’라는 뜻으로 殆(태)와 같다. 夫禮의 夫는 ‘저’라는 지시기능을 가진다. 若不相似然은 서로 같지 않은 듯 그러하다는 말이다.
경추씨가 말한 禮는 근대 이전의 부자 관계와 군신 관계에서는 매우 큰 의미를 지녔다. 하지만 때때로 그것이 형식으로 고착되어 恩(은)과 敬(경)을 베풀 곳이 없어지기도 했다. 맹자는 당시의 군주들이 권세를 믿고 사람을 함부로 대하므로 더는 경을 베풀 곳이 없다고 여겼다. 그렇기에 경추씨가 말하는 공경의 예와는 다른 태도를 지닌 것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