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이 한줄]우리는 여전히 10대… 안 내켜도 그게 삶인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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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8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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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른이 되어 강해졌다. 노력해서, 원해서, 그렇게 됐다. (…) 이제 자신을 불행덩어리라고 저주하는 일은 없어졌다. 난… 재미없는 녀석이 됐다.

―일본 만화 ‘시가테라’ 중에서
오랜만에 만난 고교 동창 A. 보자마자 시비부터 건다.

“야, 그새 왜 이리 많이 삭았어? 뱃살 봐라. 흰머리도 있네. 관리 안 하냐?”

이 자식이…, 살짝 짜증 모드. 하지만 참자. 사람 좋은 척 웃어넘긴다.

“허허, 그러게. 넌 그대로다. 와이프가 잘해 주나봐?”

“…. 나 아직 결혼 안 했다.”

미안하다, A야. 총각인지도 모르다니 친구 자격도 없다. 근데 진짜 사과할 건 따로 있다. 그대로란 거 거짓말이다. 학창시절 앳된 얼굴은 어디 가고. 넌 더 늙었더라, 이놈아.

‘시가테라’는 성장만화다. 식상한 표현으로 ‘질풍노도를 거쳐 어른의 세계로 가는’ 과정을 다룬다. 수없이 많은 만화가 다루고 또 다루는 장르. 막연한 불안과 기대, 꿈과 좌절이 공존하는 시절. 유독 청소년만화를 자주 그리는 작가 후루야 미노루(古谷實)가 전하는 ‘청춘 송가’다.

주인공 오기노 유스케는 참 평범한 아이다. 멋지지도 똑똑하지도 않다. 주눅도 잘 들고 실수도 많다. 아, 특별한 게 있다. 단짝 다카이와 함께 시쳇말로 ‘빵 셔틀’이다. 일진 다니와키에게 꽉 잡혀 산다. 먹을 것 사다 바치며 시키는 대로 다 한다. 감히 대들 엄두도 못 낸다.

그런 오기노에게도 꿈은 있다. 오토바이를 갖는 것. 얼른 면허를 따서 전국을 돌고 싶다. ‘짱’에게 들켰다간 난리가 날 테니 조심조심. 짬을 내 알바 하며 운전학원에 다닌다. 학원엔 가면 보기만 해도 기분 좋은 초특급 미녀도 있다. 근데 그 애는 내가 맘에 든다고?

사실 시가테라는 다소 의외의 작품이다. 작가의 걸작 ‘이나중 탁구부’와는 분위기가 판이하다. 방귀가스를 몇 개월 모아 친구에게 먹이는 일 따위의 엽기는 어디에도 없다. 특이한 변태들도 있긴 하지만 대체로 잔잔하다. 대단한 사건도, 엄청난 흥분도 없다. 무. 미. 건. 조.

근데 원래 인생이 그렇지 않나. 경천동지할 일을 경험하는 건 몇몇 소수다. 대다수는 다 거기서 거기다. 은근슬쩍 나이 먹고 어영부영 늙어간다. 10대가 성인이 되는 유일한 길. 날짜가 가는 대로 달력을 찢으면 된다.

하지만 그 ‘날짜’에 묘한 함정이 숨어 있다. 인간이 그 순간순간에 의미를 부여해서다. 어떤 날은 특별하고, 어느 날은 무료하고. 원래 시간은 잘만 흘러간다. 인간은 그걸 괜한 잣대로 구분한다. 12월 31일과 1월 1일은 그저 어제와 오늘일 뿐인데. 풍선에다 자꾸 공기를 불어넣는다.

“우리는 결코 무(無) 속에 머물러 있지 않다. 우리는 항상 충만 속에, 존재 속에 있다. 마치 얼굴이 쉬고 있을 때나 심지어 사망해 있을 때도, 늘 무엇인가를 표현하지 않을 수 없게끔 되어 있는 것처럼.”(모리스 메를로퐁티, ‘지각의 현상학’ 중에서)

물론 이런 주입이 잘못은 아니다. 10대라면 특히나 그렇다. 상상이 인생을 만든다. 상상대로 될지는 몰라도 상상이 움직이는 자양분은 된다. 목표를 세워야 달성도 하고 실패도 하니까. 남들과 비슷한 꿈도 좋고, 자잘한 계획도 나쁘지 않다. 안 그래도 시간은 훌쩍 지나간다.

다만 입맛에 맞는 것만 기대하진 말길. 빛은 어둠을 동반한다. 성인이 되면 달라진다고? 30대, 40대가 돼도 엇비슷하다. 완성이나 통과란 없다. 어른은 그저 먼저 가고 있을 뿐. 뻔하고 따분하고. 도통 모르겠는 건 여전히 모르겠다. 그런 차원에서 우린 모두 그냥 아이들이다. 누구에게도 10대는 끝나지 않는다. 그게 ‘삶’이다. 아무리 내키지 않더라도.

P.S. 시가테라는 ‘열대·아열대 해역 산호초 주변에 서식하는 유독 어류에 의해서 일어나는 치사율이 낮은 식중독의 총칭’(네이버 지식사전)이란다. 뭐라는 건지.

ray@donga.com  

레이 동아일보 소속. 첨에 ‘그냥 기자’라고 썼다가 O₂ 팀에 성의 없다고 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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