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건너온 신명(神命)은 영국 최대 규모의 공연장도 들썩거리게 만들었다. 한국적 샤머니즘을 밝고 건강하게 풀어낸 반복적 리듬과 경쾌한 어깨춤 앞에 ‘신사의 나라’ 관객들도 몸을 앞뒤로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슬픔이 고여 있는 한(恨)이 한 올 한 올 배어 있는 국악 반주 사이로 익살과 해학이 담긴 몸짓이 펼쳐질 때면 공감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한국 무용 최초로 에든버러 국제 페스티벌에 공식 초청된 안은미무용단의 ‘프린세스 바리-이승 편’ 공연이 19∼21일 에든버러 플레이하우스에서 펼쳐졌다. 한국 무속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이 과연 영국 최대 공연장의 3000여 객석을 채울 수 있을지 처음엔 의문이었다.
페스티벌 주최 측은 빡빡 깎은 머리에 한옥의 단청빛깔을 연상시키는 빨강과 초록색 옷을 즐겨 입는 무용가 안은미 씨를 전면에 내세웠다. ‘한국의 피나 바우슈’라는 익숙한 소개 문구보다는 ‘한국 무용계의 레이디 가가’라는 참신한 문구를 앞세워.
효과는 상당했다. 첫날 공연에 3층을 제외한 2000여 석 중 3분의 2 이상이 찼다. 1층은 거의 빈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페스티벌 주최 측에선 “사흘간 전체 공연 티켓의 60% 가까이가 팔려 나갔다”고 밝혔다.
관객이 공연을 이해하는 데는 이중의 어려움이 존재했다. 첫 번째 어려움은 한국 관객에게도 아직은 익숙하지 못한 바리공주 설화를 좇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게다가 2008년 첫선을 보인 이번 작품은 그 설화의 핵심을 뺀 채 전반부만 다뤘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바리공주가 이승에서 온갖 천대를 받으며 가슴속 깊이 한을 쌓아가는 내용이다. 2010년 발표된 저승 편은 함께 공연되지 않았다.
두 번째 어려움은 그 한이 서린 이야기를 비약과 상징의 현대무용의 문법으로 풀어낸 점이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별되지 않은 나신이 등과 엉덩이를 보이며 드러누워 있는 가운데 남녀 무용수들이 하반신만 사용해 그로테스크한 몸짓을 그려내는 첫 장면부터 상징적이다. 바리공주 역으로 남자 소리꾼 이희문 씨를 기용하는가 하면 남자 무용수들이 모두 치마를 입고 춤을 춰 성적 정체성을 모호하게 만든다. 전통 한복과 갓 차림의 무용수, 오토바이를 함께 등장시켜 시간적 배경도 뒤섞어 버렸다.
이에 대한 관객의 반응은 둘로 나뉘었다. 머리로 작품을 따라간 관객에게선 “난해하다”는 반응이 나왔다. 몸으로 작품을 받아들인 관객에게선 “에너지가 흘러넘친다”는 반응이 나왔다. 다행히 난해하다는 반응을 보인 관객 중에서 상당수는 작품에 등장하는 다양한 상징이 강렬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낳았다고 말했다.
공연이 끝난 뒤 “왜 남자 무용수에게 바지가 아니라 치마를 입혔는가”,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난 남자의 정체는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이 쏟아졌다. 특히 남성용 치마, 킬트를 입는 스코틀랜드의 전통 때문인지 ‘치마 입는 남자’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이었다. 에든버러는 스코틀랜드의 수도다.
안 씨는 “원작에선 바리가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버림을 받는데 제 작품에선 이를 남성과 여성을 함께 지닌 채 태어나서 버려진 것으로 설정했다”며 “바리로 대표되는 샤먼을 이승과 저승뿐 아니라 남성과 여성, 과거와 현대 같은 경계를 모두 초월하는 존재로 그리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에너지 넘치는 무대에 반한 관객들의 반응은 더 뜨거웠다. 안 씨를 붙잡고 “당신의 다음 작품이 궁금하다”거나 “내년에 꼭 다시 와서 공연을 보여 달라”는 관객도 많았다. 심지어 극장 밖에서 1시간 이상 안 씨를 기다렸다가 “너무 큰 감명을 받아 손이라도 잡아보고 싶었다”는 노부부 관객도 있었다.
‘프린세스 바리’는 그렇게 전통과 현대가 뒤섞인 한국예술의 독창성을 영국 관객의 머리가 아닌 몸에 불어넣는 주술을 펼쳤다. 그것은 확실히 중국 전통 연희에 현대성을 가미한 중국과 대만의 공연들과 차별화되는 무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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