큼지막한 고글을 쓰고 찍은 프로필 사진이 인상적인 소설가 박민규를 처음 알게 된 건 2003년 출간된 그의 두 번째 단행본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통해서였다. 스포츠 기자들 사이에선 특히 화제가 됐는데 물론 야구를 소재로 한 데다 무엇보다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소설가 이외수가 “대한민국 문학사를 통틀어 가장 신선하고 충격적인 사건”으로 박민규라는 작가의 출현을 꼽을 만큼 국내 문학계에도 인지도를 높인 그의 그 다음 번 단행본이 2005년 나온 ‘카스테라’다. 문예지에 틈틈이 발표했던 그의 단편 10편을 묶었다. 그런데 한 없이 가벼운 구어체의 표현들로 묵직한 감동까지 낚은 ‘삼미 슈퍼스타즈…’와 비교하면 너구리, 기린, 도도새 등 동물들을 대거 등장시킨 이 책의 초현실적 단편들은 감동까지 낚기엔 각각 길이가 너무 짧았다.
하지만 이 단편들, 의외로 무대와 궁합이 잘 맞았다. 그의 톡톡 튀는 구어체의 글들은 그대로 훌륭한 대사였다. 박민규 특유의 기발한 상상력은 오감을 충족시키는 무대라는 특성 때문에 확장되면서도 현실적이었다. 도랑 치고 가재 잡는 셈이다. 동명의 연극(성종완 박소영 연출)은 이 책의 단편 중 표제작 ‘카스테라’와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세 편을 옴니버스 형태로 묶었다.
세 작품의 ‘품질’에는 다소 편차가 있는데 완성도가 그중 제일 나은 건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다. 줄거리는 이렇다. 학창 시절 록그룹 ‘비씨엔’의 메인보컬이었던 주인공 ‘로커’는 인턴으로 취직한 직장에서 업무시간에 컴퓨터로 ‘너구리 게임’에 몰두하며 점점 너구리로 변해가는 상사를 목도한다. 한편 동성애자인 인사부장은 정규사원 채용을 빌미로 그에게 잠자리를 강요한다. 먹고살아야 하는 문제 앞에서 과거 로커로서 지녔던 자유로운 영혼이나 저항정신은 오히려 걸림돌이다. 인사팀장에게 몸을 대주고 혼자 남아 훌쩍이는 그 앞에 거대한 너구리가 나타나 등의 때를 밀어주고 비누칠까지 해주며 위로한다.
이 무슨 황당무계한 시추에이션인가 싶겠지만 너구리는 상징일 뿐이다. 세상과 타협하며 버려서는 안 될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 바로 너구리다. 너구리의 비누칠로 위로받은 로커는 노래한다.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
중간 중간 로커가 대사를 ‘로커 삘’의 노래로 하는 것은 극의 재미를 더했다. 박민규 팬이지만 소설 ‘카스테라’는 기대에 못 미쳤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특히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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