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덕노의 음식이야기]<73>우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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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8월 25일 03시 00분


소젖이 아닌 보약… 왕이 특별히 챙긴 보양식

요즘은 우유를 많이 마시기 때문에 수급에 차질이 생기면 바로 ‘우유대란’을 걱정하게 된다. 그만큼 우리가 생활하면서 알게 모르게 우유를 많이 마신다는 이야기다.

지금은 쉽게 마시는 우유지만 수십 년 전만 해도 우유는 부의 상징이었다. 1960년대에는 부잣집 아이들이나 마시는 음료였고 조선시대에는 아예 임금님이나 정승들만 접했던 특권층의 식품이었다.

왕이라도 아무 때나 우유를 마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몸이 아플 때 약처럼 먹는 보양식이었고 동짓날처럼 특별한 날 조정 대신에게 내리는 하사품이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궁중에서 필요할 때 우유를 공급하는데 특히 임금이 병이 나면 우유로 죽을 끓여 진상하고 원로대신이 병이 났을 때는 임금이 내의원(內醫院)에 특별히 명해 약으로 하사했다고 나온다.

지금은 언뜻 이해가 가지 않지만 조선에서는 우유가 그만큼 귀했다. 젖소가 따로 있었던 것도 아니고 소 자체가 많지도 않았기 때문이겠지만 농업국가인 고려와 조선에서 우유는 농사지을 송아지를 키우는 데 쓰는 식품이지 인간이 어미 소에게서 함부로 빼앗아 먹을 음식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필요한 물량만 조달했고 관리 역시 궁중 약국인 내의원에서 맡았다. ‘고려사(高麗史)’를 보면 명종 때 의관이 민간에서 우유를 모으다가 수요도 많지 않고 또 소의 건강을 해치기 때문에 우유 모으는 것을 바로 폐지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고려사 우왕전(禑王傳)에도 우유 짜는 관청을 지나다가 수척해진 소를 본 우왕이 소를 불쌍히 여겨 앞으로는 우유로 만든 음식을 진상하지 말라고 주방에 명령했다고 나온다. 이렇게 우유는 함부로 먹을 수 있는 식품이 아니었다.

조선시대도 마찬가지였다. 우유는 궁중에서 꼭 필요한 양만 농사짓는 소에게서 얻었는데 경기도 고을에서 필요한 양만큼 징발했다.

조선후기 관청의 업무를 적은 ‘육전조례(六典條例)’를 보면 궁궐의 주방을 관할하는 관청인 사복시 산하에 우유를 모으는 타락색(駝酪色)이라는 부서가 있다. 이곳에서 경기도 각 고을에 납품할 물량을 할당한 후 우유를 모아 사복시를 통해 내의원에 진상한다고 우유의 수급절차가 적혀 있다.

우유를 최종적으로 모으는 곳도 내의원이었고 우유를 배급하는 곳도 내의원이었으니 이를 보아도 우유가 단순한 식품이 아닌 몸보신을 하는 약재와 같이 취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대적으로 비유해 말하자면 청와대 주방에서 경기도의 각 지자체에 할당한 우유를 모아 청와대 주치의를 거쳐 대통령에게 제공하는 복잡한 절차를 거쳤던 것이다.

이렇게 우유를 귀하게 취급했으니 필요할 때 제대로 공급을 하지 못하면 관리가 문책을 당하기도 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를 보면 고종 임금이 드실 우유죽에 들어가는 우유를 제때에 진상하지 못한 관리를 파면하고 관련자는 모조리 문책해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왔다. 그러자 고종이 “이번에는 특별히 용서하니 앞으로는 각별히 유념하도록 하라”고 특별사면을 하는 장면이 보인다. 고종 38년인 서기 1901년의 기록이다.

<음식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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