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의 2월 날씨는 예측이 불가능하다. 내리던 눈이 갑자기 비로 변해 쏟아지는 일도 흔하다. 미처 우산을 챙겨 나오지 않은 날에 그런 상황을 만나면 정말이지 당황스럽다.
오랜만에 바람이 시원하게 불었던 2003년 2월의 어느 토요일 아침. 나는 차가운 공기를 즐기며 부두까지 산책을 하고 있었다. 갑작스레 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우산이 없었기에 눈에 띄는 상점으로 몸을 피했다. 2년 넘게 예테보리에 살면서도 존재를 알지 못했던 거대한 빈티지 가게였다.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반대편에 있는 유리 장식장 구석에서 반짝이는 도자기 술잔이 눈에 들어왔다. 진열장에 다가서는 순간 혼자 생각했다. ‘이마리(伊萬里·도자기로 유명한 일본 규슈의 항구도시) 자기가 왜 여기 있는 걸까?’ 처음엔 쇼와(昭和·1926∼1989) 초기에 만든 재현품이거나, 이마리 패턴을 모방해 만든 유럽 제품일 거라고 생각했다. 수백 년 된 오리지널 이마리 자기를 그런 동네 가게에서 만날 가능성은 거의 없었으니까.
○ 유럽서 큰 인기 끈 일본 도자기
우리에게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일본 자기는 유럽에서 알아주는 명품이었다. 17세기 초까지 유럽 도자기 시장은 중국이 석권하고 있었다. 그런데 명청 교체의 혼란기가 펼쳐지면서 중국의 도자기 수출이 어려워졌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대체 거래처로 일본을 찾았다. 그렇게 해서 이마리 도자기가 유럽으로 건너갔고 곧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심지어 나중에 세계 최고의 도자기 산지였던 중국 징더전(景德鎭)에서 이마리 자기의 문양을 넣은 제품을 만들 정도였다. 이를 ‘차이니스 이마리’라고 한다. 유럽에서도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일본과 중국풍의 자기가 많이 제작됐고, 여러 유럽 도자기 회사가 ‘이마리’란 브랜드와 패턴을 사용했다.
공교롭게도 이마리 도자기의 출발은 우리의 아픈 역사와 연관이 있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 출병했던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조선에서 끌고 온 도공들을 규슈의 사가 현 아리타에 정착시켰다. 그중 한 명이었던 이삼평은 일본 최초로 백자를 구웠으며, 지금도 일본의 도조(陶祖)로 추앙받고 있다.
당시 조선 도공들이 만든 도자기는 아리타에서 12km 정도 떨어진 이마리 항구를 통해 유럽 각지로 수출됐고, 그 때문에 ‘이마리 자기’란 별칭을 얻었다. 초기 이마리 도자기는 중국 명나라 도자기의 영향을 받아 청화백자로 제작되었으나 점차 색깔을 추가하고, 금을 덧입히면서 고급스러움을 더하게 됐다.
○ 알아보는 사람 없어 절반 값에 구입
직원에게 부탁해 진열장 안의 잔을 조심스럽게 들어 밑바닥을 확인하는 순간,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바닥의 글자체나 모양으로 봐서는 분명 메이지(明治·1868∼1912) 초기 이전에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당장이라도 사서 들고 나오고 싶은 마음뿐이었지만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물론 일본에서 같은 녀석을 발견했다면 당시의 가격표에 ‘0’이 하나는 더 붙어 있었겠지만 집에서 생활비를 받아 쓰는 유학생에게 계획 외의 지출은 분명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난 한동안 서서 고민하다가 그저 그 녀석이 좋은 주인을 만나기를 빌어주며 나와 버렸다. 그러고 ‘세상 일이 다 그런 거지’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집까지 걸었다.
일주일 후 다시 근처를 지날 일이 있었다. 물론 집에 돌아온 뒤에도 진열장 속의 아름다운 술잔이 자꾸 머릿속에 어른거렸지만, 그것이 아직 남아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내가 가게를 떠나고 한 시간도 안 되어 술잔의 가치를 볼 줄 아는 누군가가 사갔을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가게 문을 밀고 들어가서는 진열장을 주시하며 걸어갔다. ‘혹시 아직도 술잔이 그대로 있을까’란 은근한 기대를 하는 나 자신이 참 간사하다는, 그래서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나 술잔은 진열장 속에 없었다.
그냥 한번 둘러보고 나갈 생각으로 가게 안을 살펴보는데 눈이 번쩍 뜨였다.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오래된 커피잔 사이에 ‘그 녀석’이 놓여 있었다. 그 우아하고 아름다운 자태는 단번에 내 눈에 들어왔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 녀석을 집어 들었다. 놀랍게도 가격이 지난번보다 50%나 할인돼 있었다. 궁금해서 주인에게 물어보니 “아무도 사가지 않아 진열장에서 빼 놓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날 난 이마리 술잔을 가슴에 꼭 품고 집으로 돌아왔다. 혹시 깨지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면서도 우리의 인연을 고맙게 생각했다.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가끔 그때 데리고 온 이마리 술잔을 바라보며 생각에 빠질 때가 있다. 술잔이 과연 어떻게 일본에서 스웨덴까지 여행을 하게 됐는지, 주인은 누구였는지가 궁금하다. 술잔을 만든 사람의 조상이 한국인인지, 그렇다면 언제 어떻게 일본으로 건너갔을지를 상상하기도 한다.
○ 망자의 물건도 삶의 일부분으로
수집을 하다보면 이마리 술잔의 경우처럼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이나 장소에서 좋은 물건을 만나기도 한다. 한편 나와 이마리 술잔의 기막힌 인연은 스웨덴의 되드보(d¨odbo) 덕분이기도 했다. 되드보는 사람이 죽으면 유족이나 친구들이 집안의 모든 물건을 통째로 처분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선 죽은 사람의 물건을 쓰는 것에 대해 얼굴을 찌푸리는 경우가 많지만, 북유럽 사람들은 ‘세상 모든 것은 돌고 도는 것’이란 생각으로 망자의 물건을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특히 수집가 입장에서 되드보는 먼지 가득한 다락에서 보물찾기를 하는 기분을 느끼게 해 준다. 판매자가 전문 상인이 아니기 때문에 운이 좋다면 흔치 않은 물건을 무척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다. 나는 되드보를 통해 물건을 살 때마다 돌아가신 분에게 감사하며, 남겨준 물건을 소중하게 잘 사용(또는 보관)하겠단 약속을 마음속으로 하곤 했다.
일본 문예운동의 창시자이자 유명한 민예품 수집가였던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는 ‘수집물어(蒐集物語)’ 등의 저서를 통해 자신이 수집활동 중에 만났던 다양한 물건들과의 수많은 인연과 그 즐거움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다.
인연은 소중하다. 사람의 인연에 비할 바는 못 되겠지만 사물과의 인연 또한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고, 기억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그것에 바로 빈티지 수집의 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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