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가 좋았다. 물고기를 낚는 순간의 손맛은 더 짜릿했다. 그래서 낚시에 빠졌다. 그냥 낚시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연안 주변의 갯바위를 탔다. 죽을 고비도 2, 3차례. 그래도 낚싯대를 놓지 못했다. 바다와 더 가까워지기 위해 카약에 올랐다. 오늘도 그는 바다로 나가 조류에 몸을 맡긴다.
그가 사는 방식은 늘 그랬다. 경남 마산이 고향이지만 조각을 배우고 싶어 강릉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했다. 단지 코발트빛 제주바다가 좋아 연고도, 직장도 없는 제주에 뿌리를 내렸다. 가계를 책임지고 있는 아내에게는 늘 미안한 마음이지만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걸 마음껏 할 수 있는 지금이 너무 행복하다.
21일 제주 제주시 한림읍 금릉해수욕장에서 만난 박종율 씨(38) 이야기다. 카약 타는 강태공, 제주 토산품을 소재로 한 피규어(모형) 제작자, 토박이보다 더 제주도를 사랑하는 이방인 등 그를 설명할 단어는 너무도 많다.
○ 20년 경력의 낚시꾼, 카약에 꽂히다
박 씨가 처음 낚시를 시작한 건 1991년,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였다. 주 전공은 갯바위 낚시. 2005년 제주도에 정착한 그는 벵에돔에 푹 빠졌다. 벵에돔은 제주도 인근에 서식하는 어류 중에서도 수온에 민감하고 경계심이 강해 꽤 까다로운 상대다. 그는 가파도 마파도 형제섬 등 바다 낚시꾼들이 첫손에 꼽는 ‘포인트’에 살다시피 하면서 벵에돔을 낚았다.
낚시꾼이라면 당연히 갖게 되는 꿈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서 낚시를 즐기는 것. 박 씨 역시 자신만의 배를 갖고 싶었다. 그러던 중 2007년 서울의 한 낚시박람회에 갔다가 카약을 처음 접하게 됐다. 카약은 북극해 연안(그린란드와 알래스카 등지)에 사는 이누이트족(에스키모)이 바다표범의 가죽과 뼈로 처음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날렵한 유선형 카약은 강, 호수, 바다를 가리지 않고 최적의 수렵도구로 활용돼 왔다.
카약을 만난 후 박 씨의 마음은 애초의 고무보트를 떠나 카약 쪽으로 기울었다. 고무보트는 혼자서 운반하기에는 너무 무겁고 아무리 관리를 잘해도 몇 년이 지나면 본체가 삭기 시작한다. 그러나 카약은 가볍고 날렵하며 관리도 쉬운 장점이 있다. “기름 냄새만 맡아도 잘 간다”는 박 씨 말처럼 엔진을 달아도 유지비가 저렴하다.
드디어 지난해 10월, 박 씨는 꿈속에서만 그리던 카약을 장만했다. 서울의 한 카약 동호인에게서 150만 원을 주고 구입했다. 이후 카약을 타고 제주 바다를 누비기 시작했다.
기자가 본 카약은 실제로 무게가 가볍고 다루기가 쉬웠다. 박 씨의 1인승 카약(풀옵션+동력 엔진)은 길이 3m에 무게는 25kg 정도다. 선체가 둘로 나뉘는 분리형이라 아파트에서도 보관하기 쉽다고 했다. 그가 자동차 위에 실은 카약을 혼자 힘으로 내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바다로 나가는 데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보통 물때에 맞춰 나갔다가 4∼5시간 후 돌아오곤 하는데 25cm가 넘는 벵에돔(그보다 작으면 다시 놓아주는 게 낚시꾼들 사이의 룰이다) 5마리 정도는 잡죠. 제주도 대표 잡어인 용치놀래기 같은 놈은 수도 없이 올라오고요.”
물론 카약피싱의 단점도 있다. 카약을 아무리 깨끗이 씻고 잘 말리더라도 염분을 완전히 뺄 수는 없기 때문에 운반에 쓰는 자동차 곳곳에 녹이 슨다. 박 씨는 그래서 아예 소형 트럭 한 대를 중고로 장만해 카약을 싣고 다닌다.
카약 낚시는 즐겁고 손쉽긴 하지만, 망망대해에선 안전장비를 반드시 갖춰야 한다. 웬만해선 카약이 가라앉을 가능성이 거의 없지만 구명조끼는 필수다. 박 씨도 얼마 전 낚시 동료와 함께 카약피싱을 나갔다가 해치로 물이 들어오는 바람에 다급한 상황에 빠질 뻔했다.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방수팩에 휴대전화를 싸서 가져가고, 가족 등 지인들에게 반드시 행선지를 알려두어야 한다”고 그는 충고했다. 먼 바다로 나갈 때는 갑작스러운 해무(海霧)에 대비하기 위해 지도 역할을 겸하는 소형 어군탐지기를 설치하는 것이 좋다.
○ 제주 상징물로 관광상품 만드는 경상도 남자
박 씨의 정확한 직함은 제주아트토이 대표다. 1인 기업인 그의 회사는 제주관광대학 산학협동업체로 2009년 이 대학 창업보육지원센터에 둥지를 틀었다. 박 씨는 해녀, 벵에돔, 돌돔, 다금바리, 제주마, 제주흑돼지 등 제주를 상징하는 사람이나 특산품을 소재로 피규어를 제작한다.
박 씨는 2005년 단지 좋다는 이유로 제주에 입도(入島)했다. 그렇지만 당장 먹고 살 거리가 필요했다. 조소과를 졸업한 그가 주목한 것은 제주 관광상품. 가장 흔한 돌하르방마저도 ‘메이드 인 코리아’가 거의 없다는 점이 사업의 단초가 됐다. 그는 제주의 상징물로 괜찮은 상품을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해서 만든 ‘테우(뗏목의 제주 방언)만들기 DIY 목공키트’와 물고기를 소재로 한 ‘제주 바다이야기 피규어’가 제주 관광기념품 공모전에서 2009년과 2010년 각각 디자인상과 특선을 수상했다.
피규어 작품에선 특히 낚시꾼으로서의 그의 진가가 유감없이 발휘됐다. 박 씨는 “낚시꾼이다 보니 물고기를 만드는 게 가장 자신 있었다. 물고기 중에서는 주로 ‘돔’ 피규어를 만들었다”며 “벵에돔, 돌돔, 참돔, 감성돔에다 제주도 특산품인 다금바리까지 5종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물고기 피규어는 수상 직후부터 서귀포시 제주컨벤션센터와 제주시 토산품전시판매장 등에 입점해 짭짤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 입소문은 제주 밖까지 번졌고, 올 초부터는 소량이지만 인터넷으로도 판매가 이뤄졌다.
나름 잘나가던 그에게 엉뚱한 곳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그는 피규어를 우레탄 사출 방식으로 만든다. 이 방식은 제작 과정에서 먼지와 냄새가 많이 발생하는데 사무용 건물인 학교 창업보육지원센터는 환기에 한계가 있었던 것. 방독면도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더구나 심한 소음으로 같은 건물에 입주한 회사에 피해를 주는 것 같아 결국 올해 6월 철수를 결정했다. 인터넷 판매도 함께 중단했다.
“현재 작업실로 쓸 만한 조용한 농가를 알아보고 있습니다. 적당한 매물이 없어 걱정이네요. 내년 1월이 되면 제주도 전역이 이사철이 되니 그때까지 기다려봐야죠.”
제주에선 전통적으로 신구간(新舊間·대한 5일 후부터 입춘 3일 전까지)에 이사 수요가 절정에 이른다. 신구간은 ‘지상을 관장하는 신들이 옥황상제의 부름을 받아 하늘로 올라가는 기간’으로 제주 사람들은 이때 이사를 해야 액운이 끼지 않는다고 믿는다.
한동안 용돈벌이마저도 힘들게 된 지금 박 씨는 아내에게 가장 미안하다.
“아내는 11년간 연애를 할 때는 물론 결혼 후에도 낚시에 미쳐있는 저를 한 번도 탓하지 않았어요. 제가 제주로 훌쩍 떠나왔을 때도 묵묵히 참아줬고요. 너무 고맙죠. 또 미안하고….”
공무원인 아내 김선영 씨(34)는 제주로 발령을 받은 2009년 7월에야 제주도로 왔다. 박 씨가 터를 잡은 지 4년, 결혼한 지 9개월 만이었다. 김 씨는 “8년을 만난 오빠가 갑자기 제주도로 간다고 해 그냥 나도 따라가겠다고 했는데 정말 현실이 될 줄은 몰랐다”며 “그래도 오빠가 잡은 물고기로 만들어주는 회덮밥 맛은 정말 일품”이라며 웃었다.
제주 사람들보다 제주를 더 사랑한다고 자신하는 박 씨는 이렇게 말한다.
“바라보기만 해도 모든 게 위안이 될 정도로 아름다운 바다 하나만으로도 제주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런 제주도에서 사랑하는 제 아내와 함께 살 수 있으니 전 참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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