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을 겨우 다 오르자마자 순식간에 다시 저 아래 세계로 굴러떨어지는 돌덩이.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잠시 멈춰선 사내의 흙투성이 손에 대해 카뮈는 “하늘 없는 공간, 깊이 없는 시간으로나 헤아려볼 만한 노력”이라고 썼다.
시시포스는 효용 제로 무한반복의 표본이다. 세상에 있으나 마나 한 존재일지 모른다. 느릿느릿 올랐다가 주르륵 미끄러지는 무의미한 움직임을 거듭하던 돌덩이가 어느 날 문득 딱 하고 멈춘다 해도 그 변화를 알아채는 이, 있을 리 없다. 귓전을 거슬리던 돌 구르는 소음이 사라진 걸 감지하고 까닭 모른 채 기꺼워하는 사람이야 있겠지만.
워터게이트 사건 취재담을 다룬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 속 두 기자는 언덕 어디쯤의 시시포스였을까.
39년 전의 이야기다.
대선 경쟁후보를 도청하려 한 사건을 특종해 결국 대통령을 사임하게 만든 워싱턴포스트의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 그들을 대신할 만한 이름은 그만큼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어지간한 스캔들 뉴스는 이제 반복해서 굴러떨어지는 돌덩이마냥 식상하다. 눈에서 레이저 광선을 발사하는 귀신이라도 등장시켜야 시선을 환기시킬 수 있을까. 닮은꼴의 사건들이 쏟아지고, 지켜보는 사람들은 덤덤하고, 사건 속의 사람들도 평온하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고급 빨대취재원을 확보했던 예일대 졸업자 우드워드는 부편집인으로 2011년의 워싱턴포스트를 이끌고 있다. 고졸 학력의 지방신문 경력기자 출신이었던 번스타인은 일찌감치 회사를 떠나 자유기고가로 활동했다.
세상은 견고하다.
두 사람의 빛나는 순간은 자신들의 기사가 대통령의 하야까지 이끌어내는 것을 지켜본 날이었을까. 아니면 퓰리처상을 움켜쥔 날이었을까.
그런 건 누구와도 상관없다.
취재의 풍경은 극적이지 않다. 영화 속 빛나는 순간은 “진실은 저 너머에 있다”는 듯 담배를 피워 물고 지하주차장 그늘 아래에서 기다리던 내부 고발자를 만나는 장면이 아니다. 좌충우돌 무턱대고 들이대는 취재과정을 묘사한 도입부, 그리고 러닝타임 2시간 15분 내내 이어지던 “툭툭툭툭” 타자기 소리로 맺은 라스트 신이다. 더듬더듬 짚어 찾는 취재과정과 자판 치는 소리는 39년이 흘렀는데도 흡사하다.
쓰는 자(者).
세기의 특종을 했건 말건, 구석자리 책상에 쭈그려 앉아 자판을 두드린다. 구겨진 셔츠, 마감에 쫓겨 퀭해진 눈. 일그러진 입술에 물린 담배가 고통스러운 듯 연기를 토해낸다.
툭툭툭툭. 툭툭. 툭툭툭툭.
굴러떨어지던 돌이 산중턱에 삐져나온 나뭇등걸에 걸려 처음보다 더 멀찌감치 밀려 굴러가는 소리. 어쩌면, 한 글자 한 글자 빚어내는 손가락 리듬에 맞춰 심장이 뛰는 소리.
바뀌는 것은 없다.
시시포스 신화는 “땅에 대한 열정을 품은 자가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는 일에 존재의 전부를 바치는 형벌”을 전한다. 이기기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다. 끝까지 싸우기 위해 싸운다.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속삭였듯, 사람을 움직여 돌을 굴리게 만드는 것은 해답이 아니다. 당연해 보이는 어떤 것에 대해 문득 가진 “질문”이다. 아무 의미도 없는 듯 능청스레 삶을 에워싸고 있는, 모든 존재에 대한 질문.
툭툭툭툭. 툭툭. 툭툭툭툭.
krag06@gmail.com
krag 동아일보 기자. 조각가 음악가 의사를 꿈꾸다가 뜬금없이 건축을 공부한 뒤 글 쓰며 밥 벌어 살고 있다. 삶은 홀로 무자맥질. 취미는 가사노동. 음악과 영화 덕에 그래도 가끔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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