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孫丑·하’ 제3장에서는 맹자의 才辯(재변)이 잘 드러난다. 맹자는 賓師(빈사)의 자격으로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는데, 어떤 나라에서는 돈을 받고 어떤 나라에서는 돈을 받지 않았다. 제자 陳臻은 서로 모순되는 A와 B의 사실을 들고 A가 옳다면 B가 틀리고 B가 옳다면 A가 틀린다는 딜레마의 형식논리로 맹자에게 질문을 했다. 이 질문에 대해 맹자는 어떻게 자신을 변론하는가, 이것이 흥미롭다.
‘前日於齊에 王궤兼金一百而不受하시다’에서 前日은 시간부사, 於齊는 장소부사어, 王은 제나라 왕, 궤는 음식물이나 물자를 제공함, 兼金은 보통 금보다 몇 곱절 가격이 나가는 순도 높은 금, 一百은 一百鎰(일백일)의 준말이다. 鎰은 보통 20량이라고 하는데, 24량이라는 설, 30량이라는 설도 있다. ‘於宋에 궤七十鎰而受하시다’와 ‘於薛에 궤五十鎰而受하시다’라는 문장은 단위사 鎰은 드러냈지만 궤 다음의 목적어 兼金은 생략했다. ‘前日之不受가 是면 則今日之受가 非也라’에서 前日과 今日은 상대 개념이어서, 今日이 꼭 바로 지금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夫子必居一於此矣시리이다’는 ‘부자(선생)는 필시 이 두 가지 가운데 하나에 처해 있습니다’로, 결국 두 가지의 어디에 해당하든 필경 잘못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즉 논리상 겸금을 받은 것이 잘못이거나 겸금을 받지 않은 것이 잘못이거나 둘 중 하나라는 말이다.
한문에서 居一於此는 모순되는 두 상황 가운데 하나에 반드시 걸려 있음을 지적하는 말로 널리 쓰였다. 율곡 李珥(이이)는 ‘萬言封事(만언봉사)’에서, ‘곧은 말을 다투어 발언하는 것을 허물로 여기면, 선비들의 기운이 沮喪(저상)되고 삿된 길이 열립니다. 흰소리를 크게 말하는 것을 좋게 여기면, 허위가 조장되고 참다운 덕은 喪失(상실)됩니다. 전하께서는 필시 이 둘 가운데 하나에 처해 계십니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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