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 요리를 만들다 기름을 붓는다는 게 그만 식초를 부어버렸다. ‘요즘 고기가 얼마나 비싼데’라며 원통해하다 머릿속에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먹었던 발사믹 식초 고기 요리!
이탈리아 중부지역에는 모데나란 조그마한 도시가 있다. 여자 혼자라면 자주 뒤를 돌아보게 될 만큼 적막한 도시지만 천 년이 넘게 내려온 ‘이것’ 하나로 세계에 그 이름을 떨치고 있다. 모데나의 전통 발사믹 식초, 아체토 발사미코 트라디치오날레 디 모데나. 우리의 시골집 장이 그렇듯 그것은 오직 포도만으로 만들어지는 모데나 사람들의 ‘장’이다.
그 옛날 할머니 때부터 집안마다 내려온 비법이 고스란히 담겨 있으며, 세월의 끈덕진 힘으로 완성된다. 이 지역 전통품종 포도를 으깨어 걸러 끓여 식힌 후에 나무통에 담아 수분이 졸아들면 1∼2년마다 작은 통으로 옮기면서 최소 12년 이상 지나야 만들어진다. 모데나 가정집에서 대대로 내려오며 음식에도 쓰이고 비상약이 되기도 했으며 시집가는 딸에게 들려 보내기도 하였다. 전통 발사믹 식초의 명가로 꼽히는 가정집에서 맛본 적이 있는데, 혀에 닿자마자 응축된 와인의 맛과 화사한 단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이런 전통 발사믹 식초는 모데나 현지에서도 희귀할 정도다. 최소 12년을 묵히고 매년 정성을 쏟아야 하니 당연히 그럴 것이다. 아이러니하게 모데나 현지에서도 요즘은 (우리도 흔히 보는) 시판용 발사믹 식초를 많이 쓴다. 보통 발사믹 식초는 샐러드드레싱으로나 먹는다고 생각하지만 모데나 가정집에서는 음식의 좋은 양념이 됐다. 쇠고기나 돼지고기 요리에도, 파스타 소스로도 쓰였다.
모데나에서 시장통 맛집을 찾았다. 모데나 중앙시장 건너편의 식당 ‘알디나’. 허름한 간판에 2층에 있어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점심시간에 현지인으로 바글거리는 곳이다. 여기서 이 발사믹 식초가 들어간 돼지고기 요리를 주문했다. 한 접시 가득 발사믹 식초 소스가 흥건히 담겨 있는 강렬한 요리. 양파까지 넣어 그 시큼새콤함이 더해졌다.
잡냄새를 잡아줘 고기의 맛을 경쾌하게 이끌어냈지만 식초맛이 너무 압도적이어서 그 당시에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단순하고 강렬한 맛이 스멀스멀 떠오를 때가 있다. 하긴, 모데나 사람들의 입맛을 1000년 넘게 붙잡아 둔 맛이 아닌가. 전통 발사믹 식초로 만든 제대로 된 고기요리를 언젠가는 꼭 먹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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