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간이역을 이대로 두는 것만이 능사일까. 짧게는 50년, 길게는 100년 이상 사람들과 함께 호흡해온 간이역을 보다 가치 있게 활용하는 방안은 없을까.
최근 들어 간이역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존, 활용하는 방안을 찾으려는 시도가 잇따르고 있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장을 겸하고 있는 김종헌 배재대 교수(건축학)의 간이역 관련 연구도 그런 활동 중 하나다.
간이역은 사전적 의미로 ‘열차가 서지 않거나 승객이 적어 역장이 배치되지 않은 역’을 말한다. 그러나 실제론 역장이 있더라도 규모가 작은 역을 그냥 간이역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더 많다. 심천역이 그 예다.
전국 800여 개 간이역 중 등록문화재로 등재된 곳은 서울 신촌역(옛 역사)과 화랑대역, 부산 송정역, 충북 심천역 등 23개.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간이역은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후 별다른 보수공사 없이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건물 자체의 가치도 높거니와 우리 삶의 흔적이 그대로 묻어 있다는 점에서 간이역들은 보존 및 활용가치가 크다.
김 교수가 지난해 11월 문화재청에 제출한 용역보고서 ‘간이역 보존 및 활용 활성화 방안 연구’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23개 간이역 중 이미 폐쇄됐거나 폐쇄될 예정인 16개 간이역을 대상으로 한다. 심천역은 ‘계속 유지’ 대상이므로 이번 연구에서 빠졌다.
김 교수는 보고서 서두에 “간이역을 문화재로 등록하고 보존하기 위한 노력은 보잘것없다고 여기던 과거에 대한 애정의 표현이자, 현재의 삶을 보다 가치 있게 꾸려갈 수 있는 창조적인 행위다”라고 썼다. 그는 이를 전제로 16개 역 각각의 다양한 활용법을 제안했다.
신촌역(서울 서대문구 신촌동)의 경우 앞을 가로막은 주차장과 광장 등을 정리해 1970, 80년대 대학캠퍼스 분위기를 재현한 ‘7080 다방’이나 중장년층을 위한 공연장을 만드는 방안을 제시했다. 아파트 단지로 둘러싸인 일산역(경기 고양시 일산2동)에는 인근 주민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주민센터와 독서실을 만들고, ‘요일별 마을시장’ 같은 프로그램을 운영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임피역(전북 군산시 임피면)은 근대문화유산이 많은 군산, 호남평야의 쌀 등과 연계한 ‘생활사 전시관’ 등을 추진하기가 용이해 보이고, 도경리역(강원 삼척시 도경동)은 예술가들을 위한 창작센터와 관사를 활용한 가족 휴양센터로 활용할 수 있다.
김 교수는 보고서에서 “간이역의 보존 및 활용을 위해선 주변 환경과 상황, 그리고 특성 등을 명확하게 파악한 뒤 그에 맞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는 “간이역은 최근까지도 우리의 실질적 생활과 연결된 산업통로이자 정보통로, 물류통로, 문화통로의 기능을 당당히 수행해온 곳”이라며 “단순히 향수를 자극하는 감상적인 대상으로 바라보기보다는 실생활과의 관계 속에서 활용 방안을 찾을 때 더 큰 의미가 있다”고 덧붙였다. 즉 간이역을 보존하고 활용하는 것은 일상의 삶 속에 감춰져 있던 새로운 가치를 찾아내는 일이라는 얘기다.
김 교수는 지난달 말 기자와 만나 다음과 같은 바람을 나타냈다.
“근대의 역은 단순히 ‘스침의 공간’이죠. 반면 과거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간이역은 누구든 찾아가 남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과도 대화할 수 있는 ‘머무름의 공간’이 될 수 있습니다. 간이역을 우리 사회의 ‘비어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 빈틈 없이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잠시 쉴 곳을 만들어 주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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