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을 하던 이성계는 몹시 목이 말랐다. 때마침 발견한 우물 하나. 한달음에 달려갔더니 마침 웬 여인이 있어 물을 달라 청했다. 여인은 바가지에 물을 담은 후 버들잎 하나를 띄워 건넸다. 의아해진 이성계가 그 연유를 물었다. 그녀가 말했다.
“갈증에 급하게 냉수를 드시면 탈이 나실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천천히 불어가며 드시라고 버들잎을 띄웠사옵니다.”
태조 이성계와 신덕왕후 강씨의 운명 같은 만남이었다. ○ 왕릉은 도성에서 80리 안에 조성
519년 유구한 조선 역사에는 27명의 왕이 있었다. 이 왕들과 왕비들(연산군과 광해군, 그 부인들은 제외),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들을 42기의 능에 나눠 모셨으니, 이것이 바로 조선 왕릉이다. 북한에 있는 태조의 첫 부인 신의왕후의 제릉과 정종·정안왕후의 후릉을 제외한 40기는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역대 왕과 왕비의 무덤이 모두 남아 있는 것은 상당히 드문 사례라고 한다.
왕릉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서울 근방에 있다. 경국대전은 ‘왕릉은 도성 사대문으로부터 80리 안에 조성해야 한다’고 명기하고 있다. 80리는 능에 제사를 지내러 간 왕이 긴급 상황 발생 시 너무 늦지 않게 도성으로 돌아올 수 있는 최대한의 거리다. 정조는 한양에서 88리 떨어진 수원화성의 아버지(사도세자) 묘소(융릉)를 80리 길이라 우기며 능행을 다닌 것으로 유명하다.
왕릉을 보면 역사가 보인다고 한다. 조선의 역대 왕들을 찾아가는 여행은 무척 흥미롭고도 의미 있는 일이다. 왕릉을 탐방하는 스케치여행 첫 번째는 정릉으로 정했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으며, 여러 왕릉 중 가장 사연이 깊은 곳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 이방원의 보복으로 능이 옮겨져
정릉(貞陵)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계비(둘째 왕비) 신덕왕후의 무덤으로, 조선 건국 이후 제일 먼저 만들어진 왕릉이다. 첫 부인이었던 신의왕후는 조선 건국 전에 죽었다. 따라서 신덕왕후는 사실상 조선의 첫 번째 왕비였다.
그녀는 태조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다. 정치적 센스도 뛰어나 태조를 위험에서 구한 적도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자신의 둘째아들 방석을 왕위에 올리려 한 것이 화근이었다.
정비(신의왕후)의 아들인 이방원은 신덕왕후가 죽은 뒤 1차 왕자의 난(1398년)을 일으켰다. 방원은 정도전 등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신덕왕후 소생인 방번과 방석을 죽였다. 그리고 즉위 후에는 지금의 덕수궁 인근에 있던 신덕왕후릉을 도성 밖으로 옮겨버렸다. 당시 이장하면서 능을 구성하던 석재들을 대부분 버려두었는데, 태종은 후에 나무 다리였던 광통교가 큰 비로 무너지자 이를 돌다리로 바꾸는 데 능침의 병풍석들을 이용하게 했다. 이후 수백 년 동안 정릉은 주인 없는 무덤 취급을 받다 현종 10년(1669년)에야 송시열의 상소에 의해 복원됐다.
신덕왕후를 잊지 못했던 태조는 왕비의 봉분 오른쪽에 자신이 묻힐 자리를 함께 마련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들 태종은 부왕의 뜻을 저버렸다. 현재 태조는 경기 구리시의 건원릉에 홀로 묻혀 있다. 조선 국왕 중 왕비 옆에 묻히지 못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건원릉과 정릉 이외의 사례가 단종의 장릉과 단종비(정순왕후)의 사릉인 걸 보면 그 서글픈 사연을 짐작할 수 있다.
○ 광통교 아래서 버들잎을 띄우다
정릉스케치를 다녀오던 날 내친 김에 청계천에도 들렀다. 문득 광통교가 보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정릉을 보고 온 까닭인지 신덕왕후의 능침을 감쌌던 병풍석들이 저녁 햇살 그림자에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것만 같았다. 눈물을 머금고 정릉을 찾았던 태조도 이렇게 멍하니 병풍석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그가 병풍석이 있는 자리가 정릉이 아닌 청계천이란 걸 알면 뭐라 말을 할까.
광통교를 지나 천천히 청계천을 따라 걸었다. 뜨겁던 여름 태양이 저물어 가는 저녁, 물가에는 아이들만 신이 나 떠들썩했다. 그 옆으로 무료한 듯 버드나무들이 말없이 줄을 지어 있었다. 한 나무 아래 앉아 흐르는 물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옛날, 태조 이성계가 심한 갈증을 풀려는 욕심에 차가운 물을 벌컥 들이켤지 모른다고 걱정하며 버들잎을 띄웠던 신덕왕후 강씨. 그녀는 왕세자 자리에 너무 욕심을 가졌던 건 아닐까. 왕위를 향한 이방원의 욕심은 어땠을까. 태조도 사랑 앞에 눈이 멀어 과욕을 부렸던 건 아닐까.
나는 버들잎 하나를 따서 살며시 물 위에 띄웠다. 잎은 잔잔한 수면을 몇 번인가 맴돌더니 이내 물살을 만나 멀어져 갔다. 마음속 모든 욕심을 그 작은 버들잎 하나에 담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흘려보낼 수만 있다면….
멀리 가렴. 한강을 지나 바다까지. 네가 갈 수 있는 한 아주 아주 멀리까지. (도움말=김동순 문화재청 정릉 문화유산 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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