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6월 뉴욕 링컨센터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린 발레 지젤 공연 당시 여주인공으로 열연한 서희 씨(오른쪽). 동아일보DB
《발레리나 서희(25). 그는 최근 몇 년간 세계 최고를 향해 가장 빨리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고 있는 발레리나 중 하나다. 남들보다 많게는 7, 8년 늦은 열두 살 때 발레를 처음 시작하고도 5년 만인 2003년 스위스 로잔 콩쿠르 4위에 입상했고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을 거쳐 2004년 세계 최고 수준의 발레단으로 꼽히는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에 입단했다. 정식 단원 중 가장 낮은 ‘코르드발레(군무단)’를 거쳐 지난해 ‘주역 무용수(principal dancer)’ 아래 단계인 ‘솔리스트’로 승급했다.》 등급과 관계없이 발레단에서 ‘중용’된 지도 오래다. 2009년 7월 코르드발레로는 이례적으로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역을 맡았고 올 6월에는 ABT의 간판 레퍼토리 공연이자 낭만 발레의 대표작인 ‘지젤’의 주역으로 무대에 섰다. 6주의 여름휴가 기간을 맞아 국내에 머물고 있는 그를 3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근처의 한 레스토랑에서 만났다. 국내에선 롯데백화점 TV광고 모델로 더 친숙한 그의 얼굴은 ‘자체발광’. 환한 표정이 떠나지 않았다. 지젤 공연부터 물었다.
“지젤은 우리 발레단이 매년 무대에 올리는 작품인 데다 지난 5년간 대부분의 역할을 다 해봤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보고 아는 것과 직접 하는 것은 달랐어요. 깊이 알수록 발레가 어려워요. 작은 동작도 하나하나 허투루 쓰이는 게 없죠.”
스스로 매사에 무덤덤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번 지젤 무대에선 달랐다고 했다. “주역으로 데뷔한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 때 유니버설발레단의 문훈숙 단장님이 보러 오셨는데 공연이 끝나고 눈물을 글썽이시더라고요. 그때도 별다른 느낌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이번엔 커튼콜 때 관객을 향해 먼저 인사하고 뒤로 돌아 코르드발레를 향해 인사하는데 갑자기 울컥했어요. 이렇게 많은 사람이 나와 함께 발레 공연을 만드는구나 정말 고맙기도 하고, 과거 그들 속에서 고생했던 기억도 떠오르고….”
발레단 내에서 촉망받은 만큼 그에겐 남들보다 더 많은 역할이 주어졌다. 코르드발레 시절엔 그 역할도 하면서 솔리스트, 주역까지 소화해야 했다. 이번 지젤 때도 8회 공연 중 2회는 주역으로 서면서 다른 공연에선 솔리스트로 출연했다.
“한국이나 외국의 소규모 발레단에선 재능 있는 단원이 코르드발레를 거치지 않고 바로 주역 단계로 올라가기도 하거든요. 너무 힘들어 ‘나도 그랬으면…’ 하고 바란 적도 있어요. 지금은 그런 힘든 시간들이 헛된 게 아니었구나 생각하죠.”
현지 언론의 평가 중 기억에 남는 대목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작품을 잘 이해했다는 평가를 들었는데 그건 발레리나에겐 가장 큰 칭찬”이라고 말했다. 테크닉이 완벽해야 비로소 연기에 눈을 돌릴 수 있고, 연기가 완벽해야 작품 전체에 대한 이해가 시작된다는 것.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주역 무용수가 무대에서 혼자만 춤을 잘 추면 안돼요. 따로 연습을 하는 다른 무용수들과 무대에서 완벽하게 호흡을 맞추려면 전체 흐름을 완전히 이해해야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맞출 수 있어야 해요.”
그는 닮고 싶은 무용수로 ABT 간판 무용수였던 미하일 바리시니코프(63)를 꼽았다. 1985년 영화 ‘백야’의 주인공으로도 출연해 유명한 무용수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그는 가끔 현대 발레 무대에 서기도 한다고 했다.
“기량이 예전 같지는 않지만 그 대신 동작 하나하나에 깊은 느낌을 담아요. 무용가를 넘어 예술가죠. 무대에서 사람들을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대단해요.”
그가 꼽은 또 다른 한 명은 현재 ABT의 간판 무용수인 줄리 켄트(42)다. “아이 둘의 엄마인데도 여전히 무대에 서는 걸 보면 존경스럽죠. 무용수도 힘이 좋은 유형, 관능미가 뛰어난 유형 등 다양해요.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어야 해요. 전 여성성을 중시하는데 줄리 켄트야말로 여성다움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죠.”
예술가의 경지에 오르려면 뭐가 필요하냐는 질문에 “상상력”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상상력에 따라 몸이 만들어내는 선의 깊이가 달라진다는, 알 듯 모를 듯한 설명이 이어졌다.
늘 하는 발레지만 요즘 들어 그는 발레에 더 푹 빠져 있다고 했다. “매일 똑같이 연습을 반복하지만 매번 내 몸에 대해 새로운 것을 알아가요. 남보다 발레를 늦게 시작한 게 너무 후회돼요. 발레리나 수명을 서른 중반까지로 보면 앞으로 발레를 할 수 있는 시간이 10여 년밖에 안 남았잖아요.”
서 씨는 15일 일본 도쿄에서 유니버설발레단과 함께 지젤 공연을 마치고 16일 미국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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