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황금빛 라거의 유혹…광장이 들뜬다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9월 16일 03시 00분


골드라거 ‘필스너 우르켈’ 고향
체코 플젠의 맥주 축제 현장

지난달 하순 필스너페스트 맥주축제를 맞아 1842년 필스니 우르켈이 태어난 플젠의 플젠스키 프라즈드로이 양조장을 견학 중인 
관광객들. 냉동시설이 갖춰지기 전까지는 공장의 지하 8m에 인공동굴에서 맥주를 발효시키고 저장했다. 조성하 기자 
summer@donga.com
지난달 하순 필스너페스트 맥주축제를 맞아 1842년 필스니 우르켈이 태어난 플젠의 플젠스키 프라즈드로이 양조장을 견학 중인 관광객들. 냉동시설이 갖춰지기 전까지는 공장의 지하 8m에 인공동굴에서 맥주를 발효시키고 저장했다. 조성하 기자 summer@donga.com
《‘피보(Pivo)’, ‘보다(Voda)’. 체코의 일상 중 가장 흔한 단어로 공통점이 있다. ‘…이 안에 있다’는 전치사 ‘vo’(영어 within에 해당)다. 그 점에 착안해 풀이해 보자. ‘성분만 다른 어떤 두 물질’.

추리는 정확했다. 피보는 ‘맥주’보다는 ‘물’이다.

피보와 보다의 관계처럼 구미에서 맥주와 물은 동의어였다. 적어도 17세기까지는. 맥주가 물을 대신했고 물 대신 맥주를 마셨다. 중세는 상하수도가 개발되지 않아 공중위생이 열악한 시대였다.

그래서 오염된 식수 때문에 물 탈과 질병이 잦았다.

페스트 창궐도 그 탓이다. 그런데 맥주만 마시면 탈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맥주는 양조 과정에서 끓인 물을 사용했다.

지금 지구상에는 수천 종의 맥주가 있다. 그런데 이 다양한 맥주를 양조법상으로 분류하면 크게 두 가지다.》

발효를 마친 필스너 우르켈이 담겨 있는 거대한 오크배럴(위)과 지난달 27일 플젠에서 열린 필스너페스트 맥주축제를 찾은 체코 젊은이들.
발효를 마친 필스너 우르켈이 담겨 있는 거대한 오크배럴(위)과 지난달 27일 플젠에서 열린 필스너페스트 맥주축제를 찾은 체코 젊은이들.
알코올 발효가 술통 상부에서 진행되느냐 하부에서 진행되느냐, 즉 상면(上面)발효의 에일(Ale)이냐 하면(下面)발효의 라거(Lager)냐다. 우리가 주로 마시는 맥주는 발아시킨 보리로 맥아즙을 만들어 여기에 효모를 넣고 홉가 함께 저온에서 오랫동안 발효시킨 라거. 전 세계 생산량의 80%를 차지한다. 이 라거가 맥주의 대표선수가 된 이유. 깔끔한 맛과 넘치는 청량감, 부드러운 목 넘김 덕분. 바꿔 말하면 라거 이전의 옛 맥주는 그렇지 못했다. 그때까지는 보리 밀 등 다양한 곡물로 빚은 에일이 대세였다.

지구를 대표하는 맥주, 라거. 체코의 프라하에서 서쪽으로 90km 떨어진 도시 플젠은 그 라거가 최초로 탄생된 ‘맥주 성지(聖地)’다. 아울러 플젠과 동일시되는 오리지널 골드라거의 대명사 ‘필스너 우르켈(Pilsner Urquell)’의 고향이다. 이번에는 프라하가 아니라 필스너 우르켈의 황금빛 쌉쌀함 라거를 맛보러 플젠으로 체코여행을 떠난다.

1842년, 투명한 골드라거의 탄생

지난달 26일. 플젠에서는 맥주축제 ‘필스너 페스트(Pilsner Fest)’가 한창이었다. 플젠까지는 고속도로로 한 시간. 도로는 옛날 ‘보헤미아’라고 불렸던 한적한 구릉의 평야를 가로질러 한적한 도시 플젠까지 이어졌다. 유럽 어디고 비슷하지만 이곳 역시 바로크양식 건물이 사방으로 고딕 성당을 에워싼 광장 등 유적급 고건축물이 도시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플젠 시민의 자랑거리는 두개. 체코의 국민차 스코다(Skoda), 라거 맥주의 효시인 필스너 우르켈이다. 모두 이곳에서 생산된다.

필스너 우르켈의 원래 뜻은 ‘필스너 라거의 원재료(두줄보리, 사츠 효모, 플젠 연수)를 사용해 플젠에서 양조한 맥주’다. 즉 ‘오리지널 필스너’를 뜻한다.

때는 1842년 10월 5일. 첫 하면발효 라거를 생산해낸 시민양조장(현재 필스너 우르켈을 생산 중인 ‘플젠스키 프라즈드로이’ 양조장)은 온통 흥분의 도가니였다. 이제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황금빛깔의 투명한 맥주 때문이었다. 맛도 달랐다. 가볍고 상큼한 이 라거는 무겁고 걸쭉하며 빨갛고 탁한 기존 에일과 완벽하게 다른 ‘새로운 맥주’였다. 이 황금빛깔 라거를 양조해낸 주인공. 뮌헨에서 초빙한 젊은 독일인 요제프 그롤이었다. 그는 플젠의 연수(軟水)와 부근 사츠 지역에서 수확한 홉, 그리고 플젠시민이 키운 두줄보리로 이 특별한 맥주를 빚었다.

플젠스키 프라즈드로이 양조장 지하 8m저장고의 오크배럴에서 플라스틱컵에 막 따라낸 필스너 우르켈 맥주. 샴페인처럼 기포가 바닥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특별한 라거.
플젠스키 프라즈드로이 양조장 지하 8m저장고의 오크배럴에서 플라스틱컵에 막 따라낸 필스너 우르켈 맥주. 샴페인처럼 기포가 바닥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특별한 라거.

양조에 대한 새로운 생각, 맥주에 대한 뜨거운 열정, 자신들은 뭔가 특별한 것을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보헤미안적 기질이 이들로 하여금 누구도 기대치 못했던 필스너 우르켈 같은 골드라거를 만든 것이다.

플젠의 골드라거는 19세기 유럽에 화제가 됐다. 특히 독일 바이에른에서. 하면발효 양조법은 애초 바이에른에서 개발됐다. 하지만 정작 바이에른에서 생산된 라거는 황금빛깔도 아니고, 가볍지도, 목 넘김이 부드럽지도 않았다. 플젠비어를 마신 사람들은 환호했고 유럽 각국은 맥아(발아된 보리)를 이용한 하면발효 맥주(골드라거) 양조에 매달렸다. 그러다 보니 생산된 맥주마다 필스(Pils), ‘필젠(Pilsen)’, ‘필세너(Pilsener)’라는 이름이 붙었다. 샴페인이 스파클링 와인의 대명사로 불리듯 플젠 역시 골드라거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 그러자 플젠은 두 가지 조치를 취했다. 우선 이름을 바꿨다. ‘필스너 우르켈’은 그렇게 탄생했다. 투명한 전용유리잔도 개발했다.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황금빛 라거가 돋보이도록.

필스너 우르켈이 생산되는 플젠스키 프라즈드로이 양조장. 1842년 골드라거가 탄생된 역사적인 곳이다. 고딕성당과 바로크 건물로 이뤄진 구시가에서 걸어서 10분. 공장 입구는 돌로 지은 문으로 장식돼 있다. 필스너 우르켈 상표의 빨간 실링(seal·압인)과 유리병 겉면에 등장하는 ‘비어게이트(Beer Gate)’다. 문설주에 명료하게 새겨진 숫자 ‘1842’. 이 도시, 아니 체코의 국민적 자랑거리다.

8m 지하 통로서 냉장 숙성

그날은 이틀간의 축제 첫날. 축제장은 소박했다. 뮌헨의 맥주축제 옥토버페스트와는 달랐다. 이틀간 참가자도 4만2000명 정도. 하지만 내용은 뮌헨과 진배없다. 공장 안 길가에는 먹거리 노점이 생맥주 부스와 함께 줄지어 들어섰다. 즉석에서 숯불로 구워 내는 전통 도넛 ‘트레다니’, ‘슈타로프라슈카 숭카’라는 돼지넓적다리 햄 바비큐와 소시지, 설탕을 코팅해 달콤한 아몬드구이 ‘망들라’, 체코식 닭꼬치구이인 ‘슈레스 슈피스’ 등등. 여기서 파는 맥주는 필스너 프라즈드로이 양조장에서 생산하는 네 가지(필스너우르켈 감브리누스 라데가스트 코젤)로 모두 효모를 죽이지 않은 생맥주다.

이벤트도 다양했다. 그중 가장 관심이 간 것은 바텐더(생맥주를 따라주는 사람) 경연대회. 어떻게 따르느냐에 따라 맥주 맛이 천차만별이라는 말을 들어서다. 가장 맛있는 생맥주는 거품 두께가 3.5cm일 때라는 게 플젠의 정설.

플젠스키 프라즈드로이의 브루어리(양조장)투어도 이곳 방문 중에 빼놓을 수 없는 순서. 어떤 곳에도 없는 특별한 장소가 있었다. 그건 세계 최초로 황금빛깔 페일라거(Pale Lager·물과 보리, 홉으로 빚어 청량감 넘치는 라이트비어의 총칭) 양조를 가능케 한 결정적인 시설, 지하 8m 동굴저장고다. 하면발효의 라거를 빚는 효모는 저온(영하 1도∼영상 4도)에서 오랫동안(일주일 이상) 활동한다. 지금이야 냉장기술이 발달해 열대기후에서도 저온발효의 라거를 생산할 수 있다. 하지만 1842년 당시에는 언감생심. 브루마스터 그롤은 플젠의 시민양조장 지하 8m에 인공동굴을 파고 그 안에서 발효를 진행시키고 또 보관했다. 그 저장고는 지금도 건재하고 그 안에서는 현재도 거대한 오크배럴(참나무로 만든 둥그런 술통)에서 맥주가 양조되고 또 저장돼 있다.

브루마스터 파벨 프룬차 씨의 안내로 동굴 안에 들어섰다. 온몸이 오싹할 정도로 추웠다. 기온은 영상 6도. 바깥(32도)과 온도차가 무려 26도나 됐다. 한참을 지나 거대한 버킷 모양의 오크통 세 개가 서 있는 곳에 다다랐다. 나무계단을 딛고 올라서 통 안을 들여다보았다. 먹음직스러운 미색의 크림이 통 안 상부를 덮고 있었다. 발효 중인 필스너 우르켈 맥주였다. 그 옆방은 저장고. 초대형 오크배럴 20여 개가 통로 양편으로 뉘어 있었다. 발효를 마친 맥주가 저장된 통이다. 좁은 통로의 끝. 두툼한 겨울옷 차림의 한 할아버지 직원이 오크통에 아래 수도꼭지를 비틀어 방문객이 내미는 플라스틱컵에 맥주를 따라주고 있었다. 이제 막 발효를 마치고 이곳 지 하 저장고에서 숙면 중인 필스너 우르켈이었다. 필터링(효모 제거)도 하지 않아 신선한 맛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알코올 함유량 4.4도의 라거를 들이켜는 순간. 부드러운 거품 뒤로 온 혀를 감싸 안는 쌉쌀함(bitterness)이 미각을 자극했다. 마치 샴페인처럼 잔 속에서도 끊임없이 기포가 피어오르는 이 진하면서도 상쾌한 골드라거. 1842년 첫 맛도 이랬겠지.

플젠=조성하 여행전문기자 summer@donga.com  




▼ 바르톨로메오 성당 102.6m 첨탑은 플젠의 랜드마크 ▼

보헤미아 지방의 플젠은 ‘작은 프라하’다. 도시 한가운데 고적한 구시가를 두고 하는 말이다. 플젠은 여행안내 책자에조차 특별한 언급이 없는 평범한 도시. 하지만 구시가만큼은 둘러볼 만한 유적이었다. 그 중심은 레푸블리키 광장. 사방 100m가량의 정사각형으로 주변은 온통 노랑 분홍 검정 등 다양한 색깔의 화려한 바로크 건물. 플젠의 랜드마크인 바르톨로메오 성당(사진)은 그 중심에 있다. 성당은 높이 102.6m의 첨탑이 상징. 프라하 구시가의 시계탑처럼 입장료를 내면 올라가 볼 수 있다.

첨탑의 전망대. 플젠 전체가 조망된다. 사방이 온통 구릉형의 평지다. 주황색 기와지붕으로 채색된 옛 도시가 정감 있게 다가온다. 광장을 노면전차가 통과한다. 노랗고 빨간 전차의 느릿한 운행, 서두름 없는 시민들 발걸음, 은은히 퍼지는 성당의 육중한 파이프오르간 음악…. 시간이 정지한 듯한 플젠 구시가에서는 모든 게 느리다.

맥주는 이 도시의 ‘혈액’이다. 하루 일상을 맥주로 시작해 맥주로 마칠 만큼. 모닝커피처럼 모닝비어를 마시는 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도시다. 여기만 그런 게 아니다. 체코 전체가 그렇다. 맥주 소비량을 보자. 전 세계 최고인데 자그마치 연간 161L다. 여자와 어린이, 노인 등을 빼면 애주가의 음주량은 두 배 이상이리라. ‘필스너 탱크 펍’은 그래서 체코의 명물이다. ‘탱크 펍’이란 금속제 대용량 맥주통(탱크)으로 생맥주를 파는 곳. 탱크는 맥주 소비가 많은 펍(술집)에만 공급하는데 그런 탱크 펍이 체코엔 500여 곳 있다.

플젠에 들렀다면 필스너 우르켈을 맛봐야 한다. 가장 좋은 곳은 플젠스키 프라즈드로이 양조장의 지하저장고. 가장 신선하다. 두 번째는 양조장 내 펍인 ‘나 스필체’와, 맥주박물관과 연결된 ‘나 파르카누’다. 발효저장고를 개조한 나 스필체는 체코에서 가장 규모가 큰 식당(600석)이고 교도소를 개조한 나 파르카누는 19세기에 맥아 배양소로도 이용됐던 곳. 세 번째는 ‘우 살즈마누’ 레스토랑. 1637년 개업해 374년째 영업 중인 플젠 최고(最古)의 펍이다. 네 번째는 ‘필스너 오리지널 레스토랑’인 ‘우 베즈보드’와 ‘우 만스펠다’다. ‘필스너 우르켈 오리지널 레스토랑’은 플젠스키 프라즈드로이 양조장의 공식 인증 펍으로 생맥주만 내고 병맥주는 일절 취급하지 않는다. 나 스필체만 빼고 모두 구시가에 있다.

구시가의 맥주박물관도 꼭 들르자. 1492년부터 양조장인 곳으로 옛 양조시설과 기구 등 플젠의 맥주역사가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플젠의 또 하나 상징은 미로처럼 건설된 장장 20km의 지하 동굴인데 입구가 박물관에 있다. 13세기부터 군사적 목적으로 건설된 것으로 1km만 가이드투어로 공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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