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의 나라 신라, 세계에 빛을 발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9월 22일 03시 00분


집터서 나온 금관… 국립경주박물관, 금관총 발굴 90돌 특별전

1921년 9월 경북 경주의 한 집터 공사현장에서 우연히 발견된 신라 금관총 금관(국보 87호). 국내 최초로 발견된 이 금관은 신라의 화려한 황금문화를 세상에 알리는 서막이었다. 작은 사진은 출토 당시 모습. 국립경주박물관 제공(좌측 하단), 국립경주박물관은 발굴 당시 모습에 가깝게 금관총 유물을 전시해 놓았다.(우측 상단), 세련된 디자인과 정교한 공예기법이 돋보이는 새 날개 모양의 금관 장식.(우측 하단)
1921년 9월 경북 경주의 한 집터 공사현장에서 우연히 발견된 신라 금관총 금관(국보 87호). 국내 최초로 발견된 이 금관은 신라의 화려한 황금문화를 세상에 알리는 서막이었다. 작은 사진은 출토 당시 모습. 국립경주박물관 제공(좌측 하단), 국립경주박물관은 발굴 당시 모습에 가깝게 금관총 유물을 전시해 놓았다.(우측 상단), 세련된 디자인과 정교한 공예기법이 돋보이는 새 날개 모양의 금관 장식.(우측 하단)
1921년 9월 23일 경북 경주시 노서동의 한 집터 공사현장. 인부들의 손끝에서 황금빛 금붙이가 번쩍였다. 신고를 받은 조선총독부 직원들은 곧바로 조사에 들어갔다. 황금빛 금관을 비롯해 새 날개 모양의 관모 장식, 금제 허리띠와 장식, 금제 목걸이 귀고리 등 200여 점의 신라 유물이 출토됐다.

금관의 발견은 곧 ‘황금의 나라’ 신라의 발견이었다. 금관이 발견된 지 두 달 뒤인 1921년 11월, 서울의 조선총독부로 옮겨진 출토 유물의 정리 작업이 시작됐다. 1923년 10월엔 경주에 금관고(金冠庫)를 지어 금관을 관람객들에게 공개했다. 이 금관고는 이후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국립경주박물관의 전신)으로 발전했다. 1924년과 1927년엔 일본인 학자들이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컬러 사진과 영문 설명을 곁들인 보고서를 만들어 신라 금관의 존재를 세계에 알렸다.

금관이 발견된 집터는 봉분이 훼손된 5, 6세기 신라 고분이었다. 이곳은 금관이 나왔다고 해서 금관총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금관총 발견 이후 서봉총 금령총 천마총 황남대총 등 경주의 고분 곳곳에선 황금빛 금관이 잇따라 발굴됐다.

빼어난 조형미와 정교한 금속공예술을 자랑하는 신라 금관은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재로 꼽힌다. 금관총 금관 발견 90주년을 맞아 국립경주박물관이 ‘금관 최초 발견 90년―금관총’ 특별전을 10월 30일까지 개최한다.

경주박물관 고고실에 특별 코너를 만들어 금관총 금관(국보 87호)을 비롯해 금제 관모 장식, 금제 허리띠와 장식(국보 88호), 금제 귀고리와 목걸이, 금제 팔찌와 발찌, 금동 신발, 구슬 곡옥 등 출토 유물 200여 점을 모두 선보인다. 박물관은 특히 출토 당시의 모습으로 유물을 전시했다. 윤온식 학예연구사는 “금관과 같이 널리 알려진 황금 유물뿐 아니라 모든 유물을 출토 당시의 모습에 가깝게 전시함으로써 관객들이 당시의 상황과 분위기를 이해하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경주박물관은 지난해 말 황남대총 특별전에 이 같은 전시 기법을 도입해 호평을 받은 바 있다.

금관총의 황금 유물엔 극적인 사연이 담겨 있어 더욱 눈길을 끈다. 1927년 11월 10일 밤, 경주박물관(당시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에 도둑이 들었다. 금관총 출토 허리띠와 장식 등 황금 유물을 모두 훔쳐 달아났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금관에만 손을 대지 않았다. 사건 발생 후 6개월이 지나도록 수사는 진척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28년 5월 어느 날 새벽 경주경찰서장 집 앞에서 이 도난 유물들이 발견됐다. 범인은 끝내 잡지 못했다.

1956년에도 경주박물관에 도둑이 들었다. 이번엔 다른 금관총 유물을 그대로 두고 금관만 훔쳐 달아났다.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금관은 모조품이었다. 박물관 관계자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금관총 금관은 그렇게 살아남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금관총 금관이 1997년 영국 브리티시뮤지엄(대영박물관) 특별 전시에 나왔을 때 보험가는 50억 원이었다. 당시 이 금액을 놓고 보험가가 너무 낮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그러나 영국 정부가 안전을 보장하고 우리 문화재를 홍보한다는 차원에서 보험가를 저렴하게 책정한 것이었다. 이런 고려 없이 보험가를 책정한다면 400억∼500억 원에 달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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