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만 화백은 지금이라면 돌아가신 아버지와 좋은 술친구가 됐을 거라며 아쉬워한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아버지 덕에 만화에 몰두할 수 있었다. 서울 강남구 자곡동 화실에서 그가 싱그럽게 웃었다 신원건 laputa@donga.com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었다. 몇 년간 이어진 흉어(凶漁)로 아버지의 멸치어장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집은 빚잔치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광주에서 대학 다니는 형의 등록금을 마련하려고 어머니는 동네 장사하는 집에 다음 날 갚겠다며 급전을 빌렸다. 하지만 오늘 없는 돈이 내일 어디서 나오겠는가. 돈 빌려준 집에서 찾아와 한바탕 난리가 났고, 어머니와 나는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없지는 않았다. 그래서 고교 1년 후배가 내 2학년 교과서를 사러 왔을 때도 대학 갈 거니까 영어와 수학책은 팔지 않겠다고 했다. 그때 안방 미닫이문을 통해 들려온 아버지의 말씀은 47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누가 니 대학교 보내 준다더냐.”
○ 만화밖에 남지 않았다
1964년 겨울, 그날의 아버지 목소리는 만화가 허영만 씨(64)의 귀에 그 어떤 말보다도 더 크게 들렸다. 기울어가는 가세(家勢) 탓에 8남매의 셋째이자 차남인 자신이 대학에 갈 수는 없을 거라고 짐작했던 터였다. 그러던 차에 나온 아버지의 ‘선언’은 차라리 그의 마음을 편하게 해줬다.
“그 순간 딱 공부를 끊었어요. 고등학교 3학년 때 국어 영어 수학책을 비롯한 교과서 다섯 권하고 만화 그릴 잉크, 펜, 노트만 가지고 다녔지요. 1년 내내 그대로였어요.”
만화만 그렸다. 수업시간에도 대놓고 그렸다. 보다 못한 수학선생님이 “야, 수학책이라도 꺼내놓고 해라”라며 꾸중을 하셨지만 개의치 않았다. 방과 후 다른 친구들이 다음 날 새벽 한두 시까지 입시 공부를 할 때 그는 만화를 그렸다. 살길은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정말 처절하게 그렸다.
초등학교 시절 열 살 위의 누나가 가져온 학생잡지 ‘학원’에서 본 김용환 선생의 만화 ‘코주부 삼국지’에 매료됐다. 이후 만화방에서 매일 살다시피 했다. 만화 속 인물을 그린 습작품을 독자편지에 담아 잡지사에 보냈다. 답장은 한 번도 받지 못했다. 만화에 대한 애정은 그림에 대한 열정으로 번져 중학교 때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해야지’ 하고 결심했다. 당시에는 집안이 풍족했다. 남들이 보리밥 먹을 때 그의 가족은 쌀밥을 먹었다. 하지만 모든 것은 과거지사가 됐다.
고3 아들이 공부를 포기했다는 걸 어렴풋이 눈치 챘을 어머니는 그에게 “공부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당신이 해줄 수 있는 게 없는데 어떤 이야기를 하실 수 있었겠어요.” 허 화백도 대학 이야기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구차하게 매달리는 성격이 아니기도 했지만, 졸라대도 결과는 뻔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사실 만화 말고는 남은 게 없었다. 대학 졸업을 해도 취직을 못해 집에서 빈둥거리는 ‘먹고 대학생’이 허다한 때에 고졸자가 택할 수 있는 길은 5급 공무원(현재의 9급) 시험을 보거나 군대에 입대하는 일뿐이었다. 당시 입대한 그의 고등학교 친구 중에는 베트남전에 참전해 목숨을 잃은 이도 있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 같은 거 없어요. 만약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미술선생님이나 됐을까요. 학교라는 틀을 갑갑해서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생각하면, 오히려 아버지가 고맙죠. 만화만을 생각하게끔 해주셨으니까요.”
○ 서른셋까지 시달린 학력 콤플렉스
1967년 1월 상경한 허 화백은 유명 만화가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뻔한 월급에 빤한 생활이었다. 6년 정도 지났을까, 여수 관공서 앞에 대서소(代書所)를 연 아버지가 그를 불렀다. 아버지는 대서소 앞 도장 가게를 가리키며 “너 만화 그린다지만 별 볼일 없는 것 같은데 저거 어떠냐? 하루에 몇십 개는 파던데…”라고 했다. 그는 “자식이 뭔가 해보겠다는데 겨우 몇 년을 못 기다립니까”라며 발끈해서는 다음 날 서울로 올라왔다.
절치부심한 그는 1974년 한국일보 계열사가 주최한 만화 공모전에서 ‘집을 찾아서’란 작품으로 입상해 화려하게 데뷔했다. 한 심사위원은 그의 작품을 두고 “이제 우리는 만화 그만 그려야 해”라며 감탄했다. 넉 달 뒤에 내놓은 작품 ‘각시탈’은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줬다. 주인공이 탈을 쓰고 나오는 아류작도 속출했다.
그러나 정작 그의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1975년 결혼을 한 뒤에도 명색이 히트 작가인 그였지만 생활이 안 될 정도였다. 더욱이 만화산업은 1970년대 중후반 악화일로였다. 큰일 나겠다 싶어 신문 구직광고를 뒤져보았지만 절망의 연속이었다. 언제나 ‘전문대 졸 이상’이라는 지원 자격에서 걸렸다. 오갈 데가 없었다. 고등학교 밖에 나오지 않은 신출내기 만화가에게 대학을 졸업한 딸을 줄 수 없다는 처가의 반대를 이겨내면서 입술을 깨물었던 그였다.
그런 그를 구원한 것은 일본만화 ‘캔디 캔디’였다. 1979년 한국에서 번역 출간된 이 만화는 1980년까지 20만 부가 넘게 팔리고 해적판이 범람하는 공전의 히트를 쳤다. 덩달아 만화시장도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수요를 감당할 작품이 달릴 지경이었다. 출판사들은 예전에 인기 있던 작품을 다시 찍어냈다. 그의 작품도 정기적으로 재판을 거듭했다. 인세가 들어오고 작품 주문이 밀려들었다. 정신없이 만화를 그렸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겼다. “이제는 학력에 연연하지 말고 열심히 만화를 그리면서 앞날을 생각해야겠다는 마음이 됐죠. 그게 서른세 살 때쯤입니다.”
아버지 어머니에게 조그만 집을 사드리고 조부의 산소를 이장할 산을 사기도 했다. 아버지는 그에게 “잘했다”는 한마디 하지 않으셨지만 왜 아들 자랑이 없었을까 싶다. 그가 가끔씩 여수에 내려가 대서소에 들르면 이미 사랑방처럼 변한 그곳에서 소일하던 아버지 친구분들은 “부자 아들 왔다”고 했다. 아버지는 기분 좋게 친구들을 데리고 막걸리를 드시러 나가곤 했다.
○ 나는 고졸이다
허 화백은 산을 좋아한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산악계는 대학 학번을 따져 선후배 가리기를 좋아한다고 한다. 그는 그들과 함께하는 자리에서는 “야, 인마 나는 66학번이다”라고 농담한다. 1966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니 대학에 갔다면 그 학번이라는 거다. 산악계 말고도 학력을 따지는 자리는 대한민국 사회에 적지 않다. 한번은 상당히 친한 친구가 그를 앞에 두고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면서 “그놈, 고등학교밖에 안 나왔어”라고 말했다. 그 친구는 말하고 난 뒤 ‘아차’ 하듯 그의 눈치를 봤다. 편하지만은 않았다.
“누가 학력을 물으면 당연히 고졸이라고 하지요. 만화계에서는 학력을 전혀 따지지 않거든요. 만약 그런 걸 따졌다면 나도 (어디 대학을 나왔다고) 거짓말을 했을지도 몰라요.”
그러나 그는 당당하다. 당신이 캠퍼스의 낭만을 즐기며 4년을 보낼 때 8년, 12년 열심히 그렸다. 당신이 네댓 시간 공부할 때 열 시간, 열두 시간 만화를 그렸다. 나는 당신보다 만화를 잘 그린다. 당신은 다른 사람에 비해 뭐 하나 잘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 그런 자부심이다. 그는 학력과 상관없이 일가를 이룬 장인을 대접하는 분위기가 사회에 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화의 장인 허영만은 오늘도 신앙처럼 펜을 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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