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書算)을 아시나요’라는 지난 글에 당나라의 문호인 한유(韓愈)가 친구인 이관(李觀)을 위해 써준 벼루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벼루를 묻으면서(예연명·硯銘)’라는 이 글은 깨진 벼루를 땅에 묻어준 친구의 사연을 배경으로 삼았다. 고락을 같이한 벗을 영송(永送)하는 것처럼 벼루와 이별한 이관의 슬픔을 감동적으로 형상화한 내용이었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연명(硯銘) 즉, 벼루에 새긴 깨달음을 소개할까 한다.
○ 벼루를 탐하다
기물명(器物銘)의 세계에서 벼루는 자주 등장하는 손님이다. 평생 글을 써야 했던 옛 선비들에게 벼루가 얼마만큼 친근하게 애중되었을지는 그야말로 불문가지다. 나 역시 좋은 벼루를 보면 가슴이 설레 참을 수가 없다. 10년 전쯤에 강원 홍천으로 강독여행을 떠난 적이 있는데, 곽재우 장군의 후손인 모 선생님 댁에 머물게 됐다. 거실에 들어가자마자 햇살이 비치는 탁자 위의 벼루가 유독 내 눈에 들어왔다. 귀퉁이에 붉은 빛이 감돌고 돌의 결을 따라 형태를 만든 가품(佳品)이었다. 응석을 부리듯 “선생님, 이 댁에서 훔쳐가고 싶은 것이 딱 하나 있습니다”라고 했더니 “이 사람아, 저 벼루는 산 하나야! 큰 산을 팠는데도 딱 두 개만 나왔어”라며 눈독들 이지 말라셨다.
변명하자면 벼루를 탐했던 마음은 내 잘못이 아니다. 옛 문인들치고 좋은 벼루를 염원하지 않은 사람은 드물었다. 돌에 미쳐 자기의 호를 석치(石痴)라 했던 정철조(鄭喆祚)는 좋은 돌만 보면 절을 올리고 벼루를 만들었다던 18세기의 인물이다. 벼루 만들기의 명인인 그는 지인들에게 선물도 많이 했다. 이용휴(李用休)는 석치가 선물한 벼루에 감사하며, “내 이름이 닳지 않은 건, 네가 닳아 없어지기 때문. 이는 석치가 너를 통해 나를 장수케 하려는 마음이려니(我名之不磨 繇爾之磨也 此石癡子以離壽我之意也; ‘硯銘’)”라고 적었다. 벼루는 제 몸을 닳게 하여 주인을 빛내는 살신성인의 상징이다. 벼루의 이런 덕에 감사하지 않는다면 주인이 될 자격조차 없을 것이다.
또한 비슷한 시대의 박제가(朴齊家)는 유금(柳琴)이 소장한 단계연(端溪硯·중국 광둥(廣東) 성 돤시(端溪)에서 나는 돌로 만든 벼루)에 군침이 돌았던 듯하다. “영지와 감로수는 하나만 얻어도 천하에 좋은 것. 감로수에 붓을 적시고 영지 곁에서 먹을 갈며, 깜짝 놀랄 멋진 글을 짓는다면 그 기쁨이 어떠하랴(靈芝甘露 得一則爲天下祥 何筆甘露之中 磨墨靈芝之旁 以成奇偉譎怪之文章者乎; ‘柳幾何靈芝端硏銘’)라고 했다.
○ 벼루에 담긴 사연들
다음은 영조 대의 학자였던 어유봉(魚有鳳)과 문장가였던 이천보(李天輔)의 사연이다.
어유봉은 어려서 할아버지가 아끼는 벼루 곁에서 글을 배웠다. 이후 명필이 될 만한 후손에게 대대손손 전하겠다던 할아버지의 벼루를 그가 물려받았다. 나중에 그는 큰 학자가 되었으나 명필이 되지는 못했다. 만년에 그는 벼루에 그런 안타까움을 담아 후손에게 다시 전하는 사연의 연명을 남겼다.
이천보의 이야기는 보다 흥미롭다. 십대에 중부(仲父·결혼을 한, 아버지의 형제 가운데 둘째 되는 이)에게 글을 배웠는데 중부의 일본산 벼루가 좋아 자꾸 그것을 어루만졌다.
“이 벼루를 갖고 싶은 게냐? 학문이 늘면 그때 네게 주마.”
그는 몇 년 뒤에야 마침내 벼루를 넘겨받았다. 1726년 겨울, 꽁꽁 차가운 날에 그는 아끼던 이 벼루를 들고 과거시험장에 앉았다. 그런데 먹물이 모두 얼어붙어 답안을 쓸 수가 없지 않은가. 할 수 없이 숯불 위에 벼루를 데웠으나 이번에는 먹물이 흐릿해져서 탈이었다. 벼루가 잘못 되어서인가 싶어 다른 벼루로 바꿔 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 순간 이천보는 깨닫는다. 애중하던 벼루를 못 믿었던 것도 잘못이지만, 정작 자신의 마음이 숯불에도 깨지지 않은 이 단단한 돌보다 못하다는 것을. 그는 영욕(榮辱)이 엇갈릴 과거시험장에서, 벼루처럼 자신의 본성을 굳게 지켜가겠다고 다짐했다.
○ 벼루와 이별하는 방법
사람이 죽으면 고인의 삶을 기려 묘지명(墓誌銘)을 남기듯, 수명을 다한 벼루를 묻으면서 쓰는 글이 맨 앞에서 말한 예연명, 곧 벼루를 위한 묘지명이다. 지난 글에서 언급한 한유의 글이 대표적이다.
한유 이후에도 벼루를 묻으며 글을 남긴 명사들이 적지 않았다. 19세기의 박학자(博學者) 이유원은 ‘세월 따라 같이 늙었으니 함께 묻히자’고 속삭였던 반면, 18세기의 문장가 남유용은 형님 남유상의 장례에서 가족들이 남포연(藍浦硯·충남 보령지역의 백운상석을 깎아 만든 명품 벼루)을 순장하려 하자 이를 극구 만류했다. 생전에 형님이 사랑했던 벼루를 흙으로 돌려보내는 것보다는 세상에 남겨 형님의 고심과 행적이 전달될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는 “세상에서 형님을 가장 잘 아는 것은 이 벼루”라며 이따금 벼루를 쓰다듬곤 했다.
유명한 지리학자였던 신경준 또한 벼루를 매우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벼루의 운명에 관심이 깊었던 사람이다. 그는 조선중기 예학자였던 김장생의 남포연을 얻어 보물로 삼았다. 하지만 주인이 바뀌며 유전(流轉·이리저리 떠돎)하는 벼루를 보며, 귀한 것일수록 한 사람이 독점하지 못하는 것 또한 조물주의 뜻이 아닐까 생각했다. 반면 자신이 30년을 사용하다 다 닳게 된 벼루는 차마 아무데나 버리지 못하겠노라며 한양의 남쪽 인경산(引慶山) 양지 바른 곳에 묻어주었다. 유구한 세월 뒤에 누군가가 벼루를 다시 꺼내 써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함께 적었다.
주인에게 의리를 지킨 개를 위해서는 의구총(義狗塚)을 만들어준다. 그 의리가 고마워서다. 제 몸을 닳아가며 문인의 곁을 지켜주는 벼루는 하루하루가 의리의 연속이다. 말없이 인(仁)을 이루는 벼루의 운명은 남몰래 쪼그라드는 어머니의 몸과 같다. 선인들의 문집에 연명이 많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 어짊에 고마워하는 사람이 많았던 까닭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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