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동화 ‘빨간망토와 늑대’와 닮은 해님달님 설화 앞부분에 등장하는 호랑이 이야기를 단군 설화와 접목해 풀어내면서 우리 전통의 채색그림자놀이를 활용한 가족음악극 ‘자장가’. 연희단거리패 제공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우리에게 익숙한 해님달님 설화에 등장하는 호랑이의 대사다. 산골마을에 남매를 두고 잔칫집에 품 팔러온 엄마가 잔칫집에서 준 떡을 싸들고 귀가하다가 만난 호랑이로부터 듣는 말이다. 이 말은 천일야화에 등장하는 ‘열려라 참깨’에 비견할 만큼 한국인의 의식세계에 깊이 각인돼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인의 심층 무의식을 풀어낼 수 있는 ‘열쇠어’는 아닐까. 연희단거리패의 창단 25주년 기념공연 ‘자장가’(강석현 원작·이윤택 극본·남미정 연출)는 그 가능성을 흥미롭게 파고든다.
연극의 무대는 산골마을 방 한 칸짜리 허름한 오두막집. 십장생도가 그려진 여섯 폭 병풍 아래 아이가 홀로 잠들어 있다. 아이는 ‘해는 시든지 오래/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아무리 천천히 숙제해도 엄마 안 오시네’라는 기형도의 시 ‘엄마걱정’의 주인공을 연상시킨다.
아이가 꾸는 꿈은 병풍 속 움직이는 그림자놀이로 형상화된다. 무언극이지만 관객 대부분은 내용을 이미 알고 있다. 바로 해님달님 설화의 앞부분이다. 꿈은 흑백이겠지만 병풍 속 그림자놀이는 형형색색 아름답다. 경기 개성 일대에서 사월 초파일에 펼쳐진 우리 전통 채색그림자놀이인 만석중놀이를 접목한 구성이다.
남매만 있는 집 앞에 엄마가 막 도착하는 순간 아이는 꿈에서 깬다. 잠투정 하던 아이가 혼자 밥을 먹고 다시 잠이 들자 꿈의 공간이던 병풍은 도깨비들의 공간으로 바뀐다. 역시 ‘어둡고 무서워/금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아주 먼 옛날’로 이어지는 ‘엄마걱정’의 시구 그대로다. 시인뿐 아니라 모두의 눈시울을 뜨겁게 할 ‘내 유년의 윗목’ 풍경이다.
다음 순간 반전이 이뤄진다. 잠든 척하고 있던 아이가 도깨비들을 놀래킨다. 그리고 아이와 도깨비들은 이야기 스무고개를 펼친다. 아이가 읽는 동화책 내용에 맞춰 도깨비들이 그림자놀이를 펼친다. 이번에도 해님달님 설화다.
이번엔 엄마가 호랑이에게 잡혀 먹히는 순간 아이의 엄마(김미숙)가 문을 두드리며 중단된다. 엄마는 과연 진짜 엄마일까 엄마 탈을 쓴 호랑이일까. 꿈과 동화, 현실로 이뤄진 3겹의 중층구조로 이뤄진 연극은 해님달님 설화와 단군 설화에 등장하는 호랑이를 하나로 연결시킨다. 그것은 ‘상처받은 모성(母性)’의 끝없는 회귀라는 뫼비우스의 띠를 형성한다. 서양의 ‘빨간 망토와 늑대’ 설화에 대한 최근의 다양한 극예술적 변주와 차별화된 한국적 코드가 아닐 수 없다.
오랜만에 무대로 돌아온 배우 김미숙 씨의 호랑이/엄마 연기가 일품이다. 털북숭이 손으로 아이를 쓰다듬으며 야수성과 모성애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은 자아실현의 꿈과 모성 실현의 간극에서 번민하는 현대여성의 딜레마를 절묘하게 포착한다. 그래서 김 씨가 들려주는 자장가 ‘아이야, 청산가자’는 호환마마보다도 출산과 육아를 더욱 두렵게 만드는 ‘불모(不母)의 시대’에 대한 애가(哀歌)처럼 들린다. 날카로운 호랑이 발톱을 뺨에 비비며 “세상에서 엄마 품이 제일 따뜻해”라는 아이의 대사는 또 어떤가. 돌아가 안길 품을 잃고 방황하는 현대인의 근원적 외로움에 대한 역설적 표현 아닐까.
아쉬운 점은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라는 열쇠어를 정작 전체 이야기와 맞물려 풀어내지 못한 점이다. 연희단거리패가 기획한 ‘한국연극의 원형을 찾아가는 이야기 스무고개’의 첫 작품으로서 한계일지도 모른다. 스무고개가 끝날 때쯤 그 비밀을 함께 풀어내길 기대해본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i: 동화와 그림자, 음악이 어우러졌지만 공연시간은 1시간뿐이라 초등학생 이상 자녀를 둔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다. 다음 달 7일까지 서울 대학로 게릴라극장. 1만5000원∼2만5000원. 02-763-1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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