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만의 ‘자전거 식객’] 김말이 밥에 오징어무침…통영 충무김밥 “이 맛이 원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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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0월 4일 07시 00분


남해 항로를 오가는 뱃사람들을 위한 간편 식사로 개발된 충무김밥. 통영시는 90년대 명칭을 변경하기 전까지 충무시였으며 당시에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까닭에 지금까지 으로 불리고 있다.
남해 항로를 오가는 뱃사람들을 위한 간편 식사로 개발된 충무김밥. 통영시는 90년대 명칭을 변경하기 전까지 충무시였으며 당시에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까닭에 지금까지 <충무김밥>으로 불리고 있다.
13. 사천~울산 <상>

■ ‘뱃사람들의 패스트푸드’ 통영 충무김밥

사천서 굽이굽이 국도따라 내려오는 길
길, 햇살, 바람…어디서 본듯한 데자뷰
1년전 전국일주 출발 강화도의 가을이 떠오르고
12개월 자전거여행 추억 곱씹으며 도착한 통영
환상의 맛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으니…

데자뷰(deja vu). 처음 접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이미 겪었던 것 같은 모호한 느낌을 뜻하는 프랑스어다.

학창 시절, 이 단어를 처음 접했을 때 그 어렴풋하고도 딱히 설명하기 어려운 초감각적 현상을 한 마디로 표현하는 어휘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내심 놀랐었다.

사천에서 통영으로 이어지는 77번 국도는 강력한 데자뷰의 통로였다. 길, 햇살, 공기, 그리고 자전거의 구동계에서 발생하는 금속성 마찰음…. 심지어 스쳐지나가는 자동차나 행인들까지도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거슬러 돌아가 녹화된 영상의 한 부분을 재생하는 것 같은 기묘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고성 읍내를 지나 도산면 법송리의 한 버스 정거장에서 물통을 꺼내 목을 축이며 곰곰이 생각해보니 집단가출 자전거 전국일주가 시작된 것이 지난해 이맘때. 출발점인 강화도에서 느낀 가을 날씨가 오늘처럼 찬란했었다. 그리고 정확히 1년이 지난 지금 또 다시 가을은 찾아왔고 전국일주팀은 강화도로부터 약 2200km를 주파해 서해를 돌고 바야흐로 남해안의 동쪽 끄트머리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덧 1년이 지났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지난 12개월 동안의 자전거 여행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가을에 강화도를 출발한 우리들은 태안 안면도에서 혹독한 겨울을 맞았고, 보령 군산에서 봄꽃을 보았고, 아스팔트가 녹아나던 뜨거운 여름 동안 무안 목포 해남 완도 보성 구간을 질주했다.

차도로만 달렸다면 벌써 포항쯤을 통과해야할 시점이지만 가능하면 자동차를 피해 해안선을 온전히 잇는 길을 연결하고자 논밭길, 산길, 마을 뒷길, 심지어 갯벌을 횡단하기도 하는 무모한(?) 도전의 결과 주행 거리에 비해 전진이 다소 늦었다.

이제 부산을 거쳐 울산, 포항으로 올라가 동해안에 접어들면 또 다시 겨울이 올 터. 하지만 동해안 구간은 해안선이 단순해 속도를 낼 수 있을 것이다.
● 통영 충무김밥, 타 지역 아류들은 감히 범접 못할 내공의 맛

사천에서 40km 가까이 달려 점심 때에 맞춰 통영항에 도착한 우리는 이곳을 대표하는 두 가지 메뉴, 멍게비빔밥과 충무김밥 사이에서 잠시 갈피를 잡지 못했다.

멍게파와 김밥파로 갈려 갑론을박 끝에 충무김밥으로 결정이 난 것은 오후에 달려야할 거리가 만만찮아 밥을 든든히, 많이 먹어둬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었지만, 달랑 멍게 한 마리가 들어간 멍게비빔밥이 충무김밥 가격의 2배가 넘는다는 사실도 작용했다.

통영항에 즐비한 충무김밥집들은 저마다 ‘원조’ 간판을 내걸고 있어 진짜 원조를 찾는 것은 무의미했다. 자전거를 눈에 보이는 곳에 안전하게 세워두기 좋은 식당을 택해 들어갔다.

잘 알려진 것처럼 충무김밥의 특징은 밥과 반찬이 함께 섞인 일반 김밥과 달리 밥 따로, 반찬 따로라는 점이다.

반찬은 무김치와 함께 주꾸미, 홍합, 호래기(꼴뚜기), 오징어무침이 계절에 따라 달리 나오는데 우리가 들른 식당에서는 연중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오징어가 나왔다.

충무김밥의 탄생 스토리는 몇 가지가 다른 버전이 있는데 그중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이 ‘부패방지’다. 일반적인 김밥처럼 밥과 반찬을 함께 섞으면 더운 날씨에 상하기 쉽기 때문에 분리해서 만드는 충무김밥이 개발됐다는 얘기다.

초창기 충무김밥의 주요 고객은 남해항로를 오가는 선박의 뱃사람들이었다. 통영항은 예로부터 화물을 싣고 전라도와 경상도를 왕래하는 배들이 반드시 거쳐 지나는 곳으로 뱃사람들을 위한 패스트푸드였던 셈이다.

눈부시게 희고 고운 모래가 깔린 구조라해변에서 잠시 페달링을 멈추고 쉬어가는 전국일주팀. 바다 멀리 소매물도가 보이고 왼쪽으로 튀어나온 곳은 거제요트스쿨이 있는 지세포다. 이곳은 남해에서 아름다운 섬이 가장 많은 바다이다.
눈부시게 희고 고운 모래가 깔린 구조라해변에서 잠시 페달링을 멈추고 쉬어가는 전국일주팀. 바다 멀리 소매물도가 보이고 왼쪽으로 튀어나온 곳은 거제요트스쿨이 있는 지세포다. 이곳은 남해에서 아름다운 섬이 가장 많은 바다이다.

뱃사람 도시락서 시작해 전국으로 퍼져 나간 맛
밥, 김, 오징어무침, 무김치 기막힌 맛의 하모니
주린 배도 채웠겠다 거제도로 지옥의 페달링
쪽빛바다 위 해금강·외도·매물도…눈이 호강하고
앗! 이곳은 2년전 요트 집단가출호의 경유지였잖아?

깔끔하고 담백한 충무김밥은 1990년대부터 전국적으로 퍼져 서울을 비롯한 여타 대도시에서 흔히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오리지널의 맛을 쫓아가지는 못한 듯 싶다.

통영에서 맛본 충무김밥은 온기가 살짝 남아있는, 적절히 찰진 밥과 김의 훌륭한 조화 외에도 오징어무침과 무김치에 무수한 타 지역 아류들은 감히 범접하지 못할 내공이 있다.
● 한계령 축소판 같은 고달픈 거제도 ‘1018번 도로’

든든히 점심을 먹은 뒤 거제대교를 통해 견내량을 건너자 가을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손톱으로 툭 튀기면 쨍 하고 금이 갈 듯한 높고 푸른 하늘도 하늘이거니와 폐부 깊숙이 들어오는 공기에 가을의 맑은 냉기가 서려있다.

견내량은 거제와 통영사이의 비좁은 해협으로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왜군을 물리친 여러 대첩 중에서도 큰 승리로 손꼽히는 한산대첩의 시발점.

1592년 왜군의 침략이 있던 그해 7월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조류가 강하게 흐르는 견내량에 모여 있던 왜군의 주력 선단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한 뒤 학익진으로 섬멸, 왜군의 일방적 우세이던 초반 전세를 뒤집는 단초를 마련한다.

거제도는 여느 섬들과 달리 산세가 가파르고 높다. 섬의 북에서 남으로 대봉산, 대금산, 맹산, 계룡산, 노자산, 가라산 등 만만찮은 높이의 산들이 차례로 버티고 섰는데 그 산들의 정수리 부분은 벌써 일부 갈색으로 물들 채비를 하고 있었다.

견내량 남쪽 한산도 앞바다는 투명한 가을햇살 아래 남해 특유의 쪽빛이 더욱 강조되어 푸른 바다와 푸른 하늘이 수평선에서 뒤섞여 가을 정취는 절정을 이뤘다.

하지만 거제도는 우리들이 느긋하게 가을을 즐기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섬의 남서해안을 따라 이어진 1018번 도로는 전 구간이 끝없는 오르막 내리막의 연속. 사천에서 거제도 입구까지 비교적 평탄한 길을 달려왔던 멤버들은 밥을 먹은 지 얼마 안 된 시점에 갑자기 시작된 고갯길에서 지리멸렬했다.

고난의 클라이맥스는 구천저수지 부근. 저수지 앞뒤로 해발 400m의 산 2개를 넘어야했는데, 한계령의 축소판 같은 고갯길을 오르며 혹시 지나가는 트럭이 있다면 얻어 타고 가고 싶을 만큼 진땀을 빼야했다. 3시간 가까이 주구장창 페달을 밟아 7개의 고개를 오르내린 끝에 거제도 남동쪽 학동리에 도착했을 때 통영에서 먹은 충무김밥의 열량은 몽땅 소진되어 다시 배가 고팠다. 학동리에서 길은 해안 일주도로인 14번 지방도로와 합류하는데 이 곳도 물론 가끔 고개가 나타났으나 거제도의 산악지대를 횡단하는 1018번 도로에 비하면 식은 죽 먹기다. 게다가 이 도로는 한려해상국립공원을 굽어보며 달릴 수 있는 거제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다.

새로 개통한 거가대교를 건넌 대부분의 차량이 거제도 북쪽해안도로로 통행하므로 남쪽해안도로는 관광객들과 마을 주민의 차량 외엔 교통량이 거의 없어 한적하고 호젓하다. 더 좋은 것은 14번 도로와 나란히 구조라, 소현, 신촌, 와현 등 갯마을들을 통과하는 옛길이 있어 작은 어촌 골목을 구석구석 돌아볼 수 있다는 점이다.

망치몽돌 해변, 구조라 해변 등 해변도 아름답지만 거제도의 남쪽 꼬리에 해당하는 해금강과 외도, 매물도 등 아름답기로 전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수많은 섬들이 쪽빛바다 위에 눈이 시리게 펼쳐진다. 집단가출 멤버들에게 거제도 남쪽 바다는 특별히 정다운 곳이다. 2년 전 40피트 돛단배 집단가출호를 타고 전국일주 항해를 할 때 바로 이 바다를 지나갔기 때문이다. 잠시 쉬어가기 위해 구조라 해변으로 내려섰을 때 마침 요트 한 척이 2년 전 우리가 지났던 항로를 타고 유유히 스쳐지나갔다.

글|송철웅 아웃도어 칼럼니스트 timbersmit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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