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은 무엇보다 공간의 미학이다. 시간의 흐름에 맞춰 대사를 풀어놓는 것이 극작가의 몫이라면 그것을 텅 빈 무대 속에 어떻게 좌표화해서 채워 넣을 것인가에 대한 입체적 상상력은 연출가의 몫이다.
30일, 1일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한 연극 ‘마크로풀로스의 비밀’은 그런 입체적 상상력의 개가(凱歌)를 보여줬다. 연출가 로버트 윌슨은 자칫 진부하게 흐를 수 있는 이야기를 독특한 캐릭터(인물)와 다양한 스타일(양식)로 흥미진진하게 재구성했다.
로봇이란 단어를 발명한 체코의 소설가 겸 극작가 카렐 차페크의 동명 희곡을 극화한 이야기는 사람들이 꿈꿔온 불로장생의 삶이 현실화될 때의 희비극을 다뤘다. 연극의 앞부분은 차페크와 동시대 작가였던 프란츠 카프카의 냄새를 물씬 풍긴다. 3대에 걸쳐 90년간 진행된 대형 송사(訟事)를 둘러싼 블랙코미디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송사는 독신으로 죽은 요셉 프루스 남작의 유산을 놓고 그의 친조카 프루스 가문과 죽기 전 그의 구두유언으로 그 땅을 물려받기로 약속받았다는 그레고르 가문 간의 재산권 다툼이다. 마치 유전병처럼 3대째 송사를 물려받은 알베르트 그레고르는 이를 대법원에 상고해 종결지으려다 묘령의 오페라 여가수 에밀리아 마르티를 만나 결정적 단서를 듣게 된다. 요셉 프루스 남작이 비엔나 궁정오페라 가수 엘리안 맥 그레고르와의 사이에 사생아로 그레고르의 할아버지를 낳았다는 이야기다.
그 순간부터 이야기의 중심은 에밀리아 마르티로 넘어간다. 도대체 그는 누구길래 100년도 더 지난 옛 귀족의 비밀스러운 사생활을 알고 있는 걸까. 그 정체에 다가갈수록 시대도 국적도 전혀 다른 여인들의 이름이 쏟아진다. 그레고르 호적 속 친모인 그리스 여인 엘리나 마크로풀로스, 스페인의 집시무희 에우게니아 몬데스, 러시아 가수 예카테리나 미슈키나….
그들의 공통점은 이름의 첫 글자가 E와 M이란 점이다. 결국 ‘그레고르 판례’라는 희귀 재판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마크로풀로스 판례’라는 더 희귀한 재판으로 이어지고 그 모든 여인이 337세 된 동일인물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아버지가 황제를 위해 개발한 약을 먹고 불로장생하게 됐지만 냉혈한이 돼버린 여인. 관계자들은 그 처참한 결과에 경악해 에밀리아의 아버지가 남긴 불로장생약의 제조법을 불태운다.
연극은 이야기보다는 그를 끌고 가는 분장 조명 의상 무대디자인 음악 음향의 놀라운 효과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윌슨은 광대극, 마리오네트, 오페라와 중국의 경극, 일본의 가부키 등 다양한 극예술을 자유자재로 접목하는 유희를 펼쳤다. 배우들은 지극히 단순한 무대장치 위에서 마치 꼭두각시처럼 정확히 계산된 동작으로 공간을 풍성하게 채워 넣었다. 그것은 길고 지루한 송사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할 때 무대 바닥에 놓여 있던 9개의 서류더미가 서서히 부풀어 올라 무대공간을 장악하는 것과 유사한 효과를 빚어냈다.
공연 내내 3명의 악사가 피아노와 바이올린, 첼로, 퍼커션으로 흥겨운 음악과 음향을 빚어냈다. 그에 맞춰 노래를 부르던 배우들은 마지막 장면에선 악기를 들고 연주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같은 작품을 원작으로 한 야나체크의 동명 오페라를 패러디한 것이다. 무대 상황을 설명하면서 배우들이 연기할 때 필요한 소품을 이동하는 ‘지팡이를 든 남자’는 가부키의 구로코(黑子·검은색 복장으로 무대세트를 이동하거나 초자연적 존재로 등장하는 인물)였다. 에밀리아를 숭배하는 오페라 여가수 크리스티나의 노래와 대사에는 경극 배우의 그것이 엿보였다.
지난해 같은 공연장에서 윌슨이 보여줬던 1인극 ‘크라프의 마지막 테이프’에서처럼 이번 작품에서도 특별히 깊이 있는 해석은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스토리와 별개로 캐릭터와 스타일의 변주를 통해 그는 스토리의 시각화(이미지화)를 넘어서 스토리의 공간화에 기막히게 성공했다. 마르지 않는 상상력을 보여준 노장에게 박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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