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와 명이가 처음 내 입안에서 만났다. 짭짜름하고 향긋한 명이 장아찌가 단백질과 지방이 고루 섞인 일등급 한우 등심을 싸고 들어왔다. 평소보다 오래도록 씹었다. 다른 건, 이를테면 술도 말도 필요 없었다. 그 둘만으로 행복해지기에 충분했다.’
소설가 성석제 씨(51)가 최근 출간한 음식 에세이 ‘칼과 황홀’(문학동네)의 한 토막. 고소하고 상큼한 상상에 침이 절로 고였다. 성 씨에게 전화를 걸어 약속을 청했다. “술도 한잔 해야죠”라는 흔쾌한 답이 돌아왔다. 지난달 30일 저녁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한정식집에서 밥상을 마주하고 앉았다.
‘벚굴은 날것으로도 먹지만 보통은 구워 먹는데 맛이 담백하고 전혀 비리지 않다고 했다. 굴을 껍데기째 연탄불 위에 올려놓으면 익으면서 뽀얀 물이 나오며 이 물은 반드시 먹어야 한다. 맛이 ‘겁나게’ 진하다.’
‘밥알을 입에 문 채 청어 껍질을 벗기다가 귀찮아서 뼈만 바르고 4분의 1 정도 되는 큼직한 토막을 입 속으로 집어넣었다. 입에서 기다리던 밥알이 청어를 마중 나왔다. 탄수화물은 달았고 청어 껍질 속의 지방은 입에 녹아들며 고소한 맛을 냈다.’
이 책에서 전남 여수시의 특산품 ‘벚굴’과 일본의 정식(定食)을 소개한 부분들이다. 글이 짜거나 비리지 않다. 담백하고 구수한 글을 읽다 보면 끼니때가 아닌데도 음식 생각이 간절해진다. 성 씨는 고향인 경북 상주시의 묵집, 여수의 벚굴(‘강굴’, ‘벗굴’, ‘벅굴’로도 불린다)과 회, 경남 남해군에서 죽방렴(竹防簾·대나무발 그물)으로 잡은 멸치 등 지역 음식뿐만 아니라 지난해 여름 독일에서 지낼 때 마신 슈바르츠 맥주까지 다양한 먹을거리와 그에 얽힌 사연들로 푸짐하게 한 상을 차렸다. 문학동네 인터넷카페에서 3∼7월 연재한 이 글들은 매일 오후 5시에 올라와 독자들의 저녁 메뉴를 정해주기도 했다.
그의 인생에서 음식이란 어떤 의미일까.
“‘이 한 끼’는 인생에서 매번 있는 게 아니라 딱 한 번인 거죠. 내일이면 또 다른 끼니가 되는 거니까요. 결국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자기를 존중하는 마음입니다.”
소곡주를 한잔하고, 안주로 명이나물과 돼지수육을 곁들이며 성 씨는 말을 이었다. “음악을 듣거나 미술을 감상하는 것보다 더 강한 감동을 얻을 수 있는 게 한 끼의 식사입니다. 음식을 제대로 챙겨먹는다는 것은 음식하시는(만드시는) 분들을 존중하는 행위도 됩니다.”
메뉴도 확인하지 않고 회사 구내식당에 찾아가 한 끼를 때우는 데 급급한 기자가 이 말에 100% 동감은 못 했지만, 왠지 중요한 걸 놓치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맛집은 어떻게 찾을까.
“음식점이나 주인의 관상을 봅니다. 얼마나 진실하게 음식을 만드는지 음식점과 주인 얼굴만 봐도 대충 감이 옵니다.” 막연했다. 좀 명확히 말해달라고 채근했더니 성 씨는 ‘4무(無)’를 꺼냈다. ‘TV와 외상이 없고, 종업원을 찾는 벨이 없으며, 시끄럽지 않은’ 식당을 간다는 것이다. 음식점에 앉아 물을 마셨더라도, 아니다 싶으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기도 한다고.
‘술은 가성(假性) 죽음이다. 술은 꿈의 유사품이다. 고금의 재사(才士) 대부분이 술과 친한 것도 이 때문이다.’(‘칼과 황홀’ 중에서)
성 씨는 “막걸리를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어릴 적 고향에서 처음 접한 술이 막걸리였고, “여태껏 막걸리 먹다 죽은 사람을 못 봤다”는 게 그의 막걸리 예찬론. 소곡주 한 병으로 시작한 반주는 배막걸리 두 병으로 이어져 얼굴이 불콰해졌다. 음식으로 시작한 만남은 술, 그리고 문학, 문인 얘기로 이어졌다. 2차는 성 씨의 삼청동 단골 술집으로 이어졌다. 소문난 입담꾼답게 그의 말은 막힘이 없었고, 무엇보다 재미났다. 가을밤이 짧게 느껴졌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