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배우들에게 벌의 동작을 무대언어로 가르치는 현대무용가 안은미 씨(가운데). 안 씨는 키스 장면을 중점적으로 지도했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걷는 게 쉬운 게 아니에요. 걸음걸이에 에너지와 (맡은 역의) 캐릭터가 다 드러나야 해요. 자, 보폭 편안하게, 발바닥도 편안하게. 팔 동작에도 캐릭터를 담아야지. (자세가) 너무 반듯해. 수다스러운 사람이 몸은 구겨져 있을 수도 있잖아. (조)영진 선배는 너무 묵직해. 손을 너무 쭉 뻗지 말고 가려다 말아야지.”
배우들이 등장해 천천히 무대 가운데로 모이는 단순한 장면인데도 현대무용가 안은미 씨의 지적과 주문이 속사포처럼 쏟아졌다.
지난달 말 오후 서울 성북구 성북동의 지하 연습실. 13일부터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하는 신작 연극 ‘벌’ 연습이 한창이었다. 이날은 이 공연의 안무를 맡은 안 씨가 오랜만에 연습에 참여해 활기를 띠었다.
명동예술극장과 국립극단이 공동 제작하는 ‘벌’은 배삼식 작가가 지난해 토종벌이 ‘벌들의 구제역’으로 불리는 ‘낭충봉아부패병’으로 떼죽음했다는 뉴스를 접하고 쓴 작품이다. 현대문명으로 병들어가는 사람과 벌의 모습을 통해 생명의 의미를 되짚는다. 배 작가와 함께 ‘착한 사람 조양규’와 ‘하얀 앵두’ 등 소위 착한 연극에서 빛을 발해온 국립극단 상임연출가 김동현 씨가 연출을 맡았다.
무대 위에서 배우들은 벌의 동작과 비행을 흉내 내야 한다. 농촌진흥청의 도움을 받아 두 차례나 양봉 업체를 방문했다. 배우들은 벌통을 열어 벌을 관찰하고 양봉연구가에게 강의도 들었다.
안 씨에게 안무를 부탁한 것도 벌의 동작을 효과적인 무대언어로 풀어내기 위해서. 하지만 정작 안 씨는 벌 관찰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극이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기 때문에 사실적이기보다 상징적으로 벌을 표현하는 것이 더 맞다. 직접 보면 벌에 대한 내 상상력을 제한할까봐 일부러 안 갔다”고 설명했다. 그 대신 안 씨는 배우들이 연구해온 벌 동작을 절도 있는 동선으로 가다듬으면서 배우들의 움직임 전체를 조율했다.
6개의 막간극으로 구성된 이번 작품의 두 번째 막간극 ‘키스! 키스! 키스!’ 장면 연습 시간. 벌 떼가 몸에 달라붙은 뒤 기적처럼 기력을 회복한 말기 암 환자 온가희(박윤정)가 시골 택배기사 김대안(김슬기)과 사랑에 빠져 나무 아래에서 키스를 한다. 두 사람이 키스를 하는 동안 다른 배우들은 벌들이 입과 입으로 꿀을 모으는 과정을 몸짓과 대사로 설명한다. 안 씨는 키스 장면 지도에 주력했다.
“너무 빨리 입을 맞추면 안 돼. 서로 더듬고 내려오는 식탐의 손가락이 있어야지. ‘자, 어디에 빨대를 꽂아 먹을까’ 하면서. 키스는 느리게! ‘키스한다’가 아니라 ‘키스하려고 한다’는 느낌으로….”
1시간 남짓의 짧은 연습 장면을 엿본 것만으로도 안 씨의 지도가 얼마나 효과를 발휘하는지 느껴졌다. 밋밋해 보이던 장면들이 이내 훨씬 생동감 있게 살아났다.
배우 정선철 씨는 “몸과 대사가 따로 놀고 있었는데, 과연 몸에 통달한 분이라 다르다. 배우 각각의 능력을 고려해 작품의 느낌에 맞는 최적의 몸짓을 뽑아준다”고 말했다. 공연은 30일까지. 1만∼3만 원. 1644-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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