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음지교를 꿈꾸며]극작가 고연옥-연출가 김광보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0월 6일 03시 00분


날 서도록 서로 갈아준 10년 ‘숫돌 우정’

연출가 김광보 씨(왼쪽)와 극작가 고연옥 씨.이종승 기자 urisesang@donga.com
연출가 김광보 씨(왼쪽)와 극작가 고연옥 씨.이종승 기자 urisesang@donga.com
《옛사람들은 예술가들의 남다른 우정을 ‘지음지교(知音之交)’라고 불렀습니다. 춘추전국시대 초나라의 거문고 명인 백아와 그 연주만 듣고도 그 마음을 헤아렸던 종자기의 교우를 기려서입니다. 우리 공연예술계에도 그런 지음지교를 꿈꾸는 예술적 동반자들이 많습니다. 새로 시작하는 ‘지음지교를 꿈꾸며’는 오랜 세월 공동작업을 펼쳐온 공연계 ‘솔 메이트(Soul Mate)’들을 찾아갑니다.》
벌써 열두 번째 연극이다. 두 사람이 작가와 연출가로 호흡을 맞춘 작품이. 아무래도 산고(産苦)가 클 창작극만 꼽아도 다섯 번째다. 7일부터 서울 서계동 소극장 판에서 공연될 연극 ‘지하생활자들’의 극작가 고연옥 씨(40)와 연출가 김광보 씨(47)다.

두 사람은 2000년대가 낳은 연극계 최강 콤비 중 하나로 불린다. ‘인류 최초의 키스’(2001년), ‘웃어라 무덤아’(2003년), ‘발자국 안에서’(2007년), ‘주인이 오셨다’(2011년) 등 이들 콤비가 발표한 창작극은 사회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문제작으로 항상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두 사람은 부산에서 활동하다 서울로 왔고 평소 사회성 짙은 작품 활동을 해왔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따라서 두 사람이 막역한 사이일 거라고 짐작했다. 놀랍게도 두 사람은 작년까지만 해도 ‘까칠한’ 사이였다. 연출가는 작품 연출을 맡으면서 단 한 번도 작품에 대해 질문한 적이 없었고, 작가 역시 연출가가 만들어놓은 연극을 놓고 가타부타 말한 적이 없었다.

얼핏 듣기엔 완벽한 지음지교다. 하지만 거기엔 10년 묵은 팽팽한 자존심 싸움이 숨어 있었다. 고 작가는 “1999년 김 대표(극단 청우 대표)에게 ‘인류 최초의 키스’ 대본을 보낼 때부터 작품 전체를 장악하는 자신만만함이 좋아서였긴 하지만 마치 내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 징그럽기도 했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작가의 텍스트를 해독하는 것이 연출가의 몫이라는 독한 자의식 때문”이라고 말했다.

“2004년경 ‘웃어라 무덤아’ 재공연 때 사소한 말다툼이 크게 번져 서로 다시는 안 볼 것처럼 헤어졌죠. 그래서 다음 작품을 다른 연출가와 했는데 그 작품을 본 김 대표가 저보다 제 작품을 더 잘 분석하고 있더라고요. 결국 다시 손을 잡았죠.”

그렇다고 게임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고 작가는 사회적 메시지를 더욱 상징적인 언어에 담아내기 시작했고, 김 대표는 배우들과 연습시간의 절반 이상을 대본 분석에 쏟아 부었다. 김 대표는 농반진반 그런 둘 사이를 “SM(가학피학) 관계”라고 불렀다. 그 팽팽한 기 싸움이 툭 끊어진 것이 올해 초다.

“올 초 ‘주인이 오셨다’의 대본을 받았는데 한 4분의 1가량 정말 해독이 안 되더군요. 그래서 처음으로 전화를 걸어 그 의미를 물어보느라 3시간이나 통화를 했습니다.”(김 대표)

이후 두 사람은 흉허물 없는 사이로 발전했다. 김 대표는 “고 작가 작품은 내가 해독 못하면 진짜 누구도 못하는데 요즘엔 나도 두 손 들 지경”이라고 꼬집었다. 고 작가는 “그동안 꼬투리 하나 안 잡히려고 본인은 물론이고 배우들을 얼마나 괴롭혔을까 생각하면 웃음이 다 난다”고 말했다.

올해는 그들에게 특별한 해다. 지금까지 그들의 활동을 마무리 짓는 ‘주인이 오셨다’와 새로운 2기를 알리는 ‘지하생활자들’을 한꺼번에 무대화하는 해이기 때문이다. 연쇄살인범이란 사회적 악의 탄생 과정을 추적한 ‘주인이 오셨다’는 고도로 농축된 메시지를 전달하는 ‘닫힌 연극’의 형식이었다. 반면 인간 이하의 존재로 전락한 이들에 대한 구원을 모색한 ‘지하생활자들’은 뱀신랑 설화라는 신화를 앞세우면서 배우와 관객이 그 해석에 함께 참여하는 ‘열린 연극’을 지향한다.

김 대표는 “고 작가 작품이 너무 자기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서 그걸 밖으로 풀어낼 필요가 있다”고 그런 변신의 이유를 설명했다. 고 작가는 “‘지하생활자들’이 워낙 실험적 작품이라 더 상징적으로 끌고 갈 줄 알았는데 우리 국악을 접목한 우리 전통연희 양식으로 재밌게 풀어내는 것을 보고 역시 ‘나보다 날 더 잘 아는 연출가’라는 생각을 했다”고 화답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연극 인생의 축복’이라고 마음 편히 부르게 되는 데 1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어쩌면 그것은 그 긴 세월 두 사람이 ‘날이 선 작가’와 ‘날이 선 연출가’로 남아 있도록 서로를 갈아준, 숫돌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 아니었을까.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