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거정은 ‘동문선(東文選·조선 성종 때 편찬된 우리나라 역대 시문선집)’의 편찬을 주도했던 조선 초기의 대가다. 지루한 장마에 따분하기 그지없던 여름날, 청한(淸寒)이란 스님이 그를 방문했다. 기쁜 마음에 지은 시 구절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머리엔 대삿갓 쓰고 발에는 나막신 신고, 지팡이엔 술값 걸고 소매엔 시축(詩軸·시를 적는 두루마리)을 넣고. 내 허름한 집에서 마주 앉으니, 표정도 꾸밀 것 없고 속마음도 숨길 것 없네.” 맑고 차갑다는 뜻을 가진 청한 스님의 이름이 무더위와 장마를 상쾌하게 물리치는 듯하다.
시 속의 나막신은 스님의 소탈함을 드러내고자 한 물건이다. 비단 신발이 스님에게 어울릴까마는 어쨌거나 나막신은 서민적이고 소박한 느낌을 준다. 이 나막신은 조선의 선비들이 흔하게 신었던 신발이었다. 우리나라에선 적어도 신라시대부터 시작해 고무신이 대중화되기까지 나막신을 썼으니, 그 역사가 어림해도 천 년은 넘는다. 그러니 그 긴 세월 속에 나막신에 얽힌 사연이 없고 사람이 없었을까.
○ 임금이 하사한 특별한 나막신
하이힐로 멋 부리는 아가씨들은 혹 옛 선비의 후예일지 모른다. 옛 선비들도 굽 높은 나막신을 고상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속사정은 좀 다르다. 나막신을 신고 진흙탕을 걷자니 버선이 쉬이 젖는지라 굽을 높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른 나무로 만든 나막신은 금방 닳기도 했다. 그래서 가죽을 덧대기도 했고, 방수를 위해서는 밀랍을 바르기도 했다. 비싸진 않지만 짚신 미투리보다는 고급이었던 신발을 아끼자는 뜻이었으리라.
나막신을 아낀 사람 중에서 최고를 들라면 이만수(李晩秀)라는 분을 꼽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정조 임금 시절의 명신이었던 그에게는 특별한 나막신이 있었다. 오죽하면 자신의 호를 ‘나막신의 정원’이란 뜻의 극원(園)으로 했을까.
사연은 1796년 봄, 창덕궁 후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조 임금이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활쏘기를 했다. 이날 정조의 활솜씨는 쏜 화살마다 과녁에 적중할 만큼 훌륭했다. 관례에 따르면 이럴 경우에는 임금이 신하들에게 원하는 선물을 하사해야 했다.
“공이 원하는 물건은 무엇인고?” 임금이 묻자 이만수는 황공해서 머뭇거렸다. 옆에 있던 김조순(金祖淳)이 말했다. “이 사람은 집에서 나막신을 신는다 하니 나막신이나 한 켤레 주는 것이 어떠합니까?” 정조는 빙그레 웃었다. 특별히 그를 위해 나막신을 만들어주라는 명을 빠뜨리지 않았다.
국왕 정조의 입장에서는 이만수의 소박함과 소탈함이 가상하였을 것이다. 홍문관의 직제학(直提學·정3품 벼슬)에 있는 신하가 이토록 검소하게 살고 있으니 기분이 아니 좋을 수 있었을까. 그래서 ‘나쁜 습속에 물들지 말고 나를 청렴하게 보필해 달라’는 내용의 극명(銘), 즉 나막신에 새기는 글을 써 주었다.
나아가 정조는 동석한 신료들에게 화답을 청했고, 이 해 겨울에는 초계문신(抄啓文臣·규장각에 특별히 마련된 교육 및 연구과정을 밟던 문신)들을 대상으로 한 시험 문제를 아예 ‘이학사의 나막신에 새긴 글(李學士木銘)’로 정했다.
이만수는 이 감동을 표현하기 위해 왕이 하사한 나막신에 ‘학사의 나막신(學士)’이라 새겨 가보로 삼았고 자신의 호를 극원으로 바꾸었으며, 자신의 정원에는 극옹루(翁樓·나막신을 신은 노인의 누대)를 세웠다.
○ 나막신을 신은 자여, 조심하지 않으랴?
국왕이 나막신을 신은 신하의 행실에 흐뭇해하고, 문인들이 너도나도 이를 부러워하고, 나막신을 선물로 받은 신하가 평생의 영광이라 여긴 데는 우리가 더 음미해보아야 할 깊은 의미가 있다. 이만수보다 두 살 어렸던 이서구(李書九)의 눈으로 보자면, 이만수의 일은 신하의 앞길을 기대한다는 군주의 은밀한 뜻이 담겨 있었다. 신발이란 본래 걸어가는 데 이용하는 물건이니 전도양양함을 은유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다만 이서구는 “나막신은 굽이 높은 신발이라 넘어지기 쉬우니 항상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단서를 달았다. 그가 이만수에게 써준 목극명(木銘)에는 ‘소박한 나무의 성품을 모은 듯, 위태로이 살얼음을 걷는 듯(如集于木 如履于氷) 살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서구에게 글을 청한 당사자가 이만수 본인이니 이런 뜻을 결코 못 알아채지는 않았을 것이다.
율곡 이이의 어록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도 나온다. ‘어릴 적에 진창길을 갈 때는 나막신을 신었다. 처음에는 흙탕물이 묻을까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한 번 진창에 빠지면 진흙이 묻어도 아랑곳하지 않게 되었다. 이야말로 악인이 되는 과정과 같다. 어찌 조심하지 않으랴.’
이것이 바로 바른 삶의 길을 어긋난 사람들, 비리로 얼룩진 벼슬길을 걷는 사람들이 나막신의 의미를 새겨보아야 하는 이유이다.
○ 아버지의 등산화를 생각하며
유학자인 유신환(兪莘煥)은 어린 아들에게 준 나막신에다 “편한 신발 신으면 편안하고, 나막신을 신으면 절뚝거리지. 그래도 편안해하다 방심하기보다는 절뚝댈지언정 조심하는 게 낫다(着安 着危 與其安而放心也 寧危而自持, 穉子銘)”라고 당부했다.
김종후(金鍾厚)란 사람은 아랫사람인 이광석(李光錫)에게 짚신을 선물했다. 1768년 가을 이광석이 소를 타고 그를 방문했는데 마침 미투리 바닥이 뜯어져 있었다. “소가 돌아가야 하니 저도 돌아가야 합니다”라고 청하니, 김종후는 “돌아갈 방법이 있으니 소부터 보내심이…”라고 답했다. 둘은 이틀 동안 마주 앉아 경전의 말씀을 극론(極論)했다. 그런데 새 미투리를 얻어 돌아간 이광석이 한참 후 편지를 보내왔다. ‘선생께서 하필 신발을 선물한 속뜻이 땅을 가려 밟듯 바른 곳을 따라 살고, 가까운 데서 먼 곳까지 이르라는 것 아니었냐’며.
우리 집에는 남성용 등산화 두 켤레가 있다. 아버지와 나는 신발 사이즈가 거의 같지만, 나는 아버지의 등산화를 거의 신지 않는다. 김간이라는 조선의 선비는 아무리 땅이 질척거려도 아버지의 나막신을 감히 신지 못했다고 한다. 효심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이런 대목에서 나는 울컥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아버지의 등산화보다 고급 등산화를 신는 나는, 나는 대체 어떤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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