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훈(63)이 새 역사소설 ‘흑산(黑山·사진)’을 다음 주 출간한다. ‘남한산성’ 이후 4년 만의 역사소설로, 학고재 출판사가 다시 출간을 맡았다. 김훈은 역사소설에 강한 모습을 보여왔다. 충무공의 삶을 다룬 ‘칼의 노래’(2001년)는 100만 부를 넘겼고, 가야 악사 우륵을 다룬 ‘현의 노래’(2004년)도 30만 부를 넘겼다. 병자호란을 맞아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조정 내에서 척화파와 주화파의 첨예한 갈등을 그렸던 ‘남한산성’(2007년)도 60만 부를 넘기며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가 이번 역사소설에서 주목한 인물은 조선 후기 정약용의 형이자 문신이었던 정약전(1758∼1816)이다. 1783년 사마시(司馬試) 과거에 합격해 관직에 나선 정약전은 일찍이 서양의 학문을 가깝게 접하고, 천주교 신봉자가 된 진보적 지식인이었다. 하지만 조정의 천주교 박해로 동생 정약용은 전남 강진에 유배됐고 정약전은 흑산도에 유배돼 ‘자산어보(玆山魚譜)’ 등을 남기고 생을 마쳤다. 소설의 제목은 유배지인 흑산도에서 가져왔다.
‘흑산’은 극심한 정치사회적 혼란기였던 1800년 전후를 배경으로 낡은 사회 및 제도를 개혁하려고 했던 진보적 인물들의 꿈과 좌절을 펼친다. 전작 ‘남한산성’처럼 외부 세계에 무지몽매했던 권력 핵심층도 비판적으로 그렸다. 홍경래의 난, 정감록 유행, 영국 프로비던스호 입항 등 당시 역사와 사회상도 들어간다.
15년 전 서울에서 경기 고양시 일산신도시로 이사한 작가는 자유로를 타고 한강을 따라서 서울에 드나들었다. 그렇게 오가며 이 작품이 잉태되기 시작했다. 공식 출간에 앞서 공개한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밝혔다.
“귀가하는 저녁이면 하구 쪽으로 노을이 넓고 깊었다. 옛 양화진(楊花津) 자리에 강물을 향해 불쑥 튀어나온 봉우리가 있는데, 누에 대가리 같다고 해서 이름이 잠두봉(蠶頭峰)이었다. 140여 년 전에 무너져가는 나라의 정치권력은 이 봉우리에서 ‘사학(邪學)의 무리’를 목 자르고 그 시체를 강물에 던졌다. 죽임을 당한 자들이 1만 명이 넘었다.”
시간이 흘러 봉우리의 이름은 절두산(切頭山)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망자(亡者)들의 통곡은 여전히 메아리친다. 김 씨는 그들의 아픔과 고통에 주목했다.
“비 오는 날에는 절두산 벼랑이 빗물에 번들거리고 그 아래 자유로에는 늘 자동차들이 밀려있었다. 자유로를 따라서 서울을 드나들 때마다, 이 한줌의 흙더미는 나의 일상을 심하게 압박하였다. 이 소설은 그 억압과 부자유의 소산이다.”
그는 집을 떠나 올해 4월 경기 안산시 선감도에 들어갔고, 칩거 5개월 만에 원고지 1100여 쪽 분량으로 탈고했다. 연필을 한 자 한 자 밀어내며 쓴 지난한 과정 가운데 틈틈이 흑산도, 경기 화성시 남양성모성지, 충북 제천시 베론성지 등을 답사했다.
“흑산의 여러 섬에 갔더니, 물고기를 들여다보던 유배객의 자취는 풀섶에 덮였고 지나간 날들의 물고기는 오늘의 물고기로 이어져서 연안으로 몰려왔다. 섬에서 죽은 유자의 넋이 물고기가 되어 온 바다에 들끓는 것이려니 여겼다.”
투박한 말투. 그마저도 단문으로 끊어 내뱉는 과묵한 작가는 “나는 말이나 글로써 정의를 다투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다만 인간의 고통과 슬픔과 소망에 대하여 말하려 한다. 나는, 겨우, 조금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스스로를 선감도에 가둔 채 매진한 창작 과정에 대해서는 “혼자서 견디는 날들과, 내 영세한 필경(筆耕)의 기진한 노동에 관하여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고 입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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