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한일 월드컵 뒤에 나왔던 아이스크림 TV 광고를 기억하는가. 대한민국과 이탈리아의 16강전에서 이탈리아 선수가 퇴장당하는 장면을 패러디한 것이었다. 탤런트 임채무 씨가 실제 경기의 주심(에콰도르 출신 모레노 심판)을 흉내 낸 걸 생각하면 지금도 쿡쿡 웃음이 터진다.
하지만 그 경기는 이탈리아 사람들에겐 뼈아픈 기억이다. 억울하다며 두 손을 맞붙여 흔들면서 항의하던 이탈리아 선수는 오죽했으랴. 그가 바로 프란체스코 토티다. 토티는 1993년 이탈리아 프로축구 1부 리그 세리에A의 AS로마에서 데뷔해 35세인 지금껏 그 팀에서만 뛰고 있다. 팬들은 이 우직한 남자를 ‘로마의 황태자’라고 부른다. 황태자의 고향, 로마로 갔다. ○ 황태자를 만나러 가는 길
지난달 28일 로마의 황태자를 ‘알현’하기 위해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이탈리아행 여객선을 탔다. 꼬박 하루 만에 로마에서 가장 가까운 치비타베키아 항구에 내렸다. 로마로 이어지는 고속도로는 잘 닦여 있었지만 무척 어두웠다. 기름을 채우러 들른 고속도로 휴게소에서는 트럭 운전사들이 쓰디쓴 에스프레소를 즐기고 있었다. 우리는 카푸치노를 주문했다. 한 잔에 1.4유로(약 2200원), 양은 한국에서 파는 것의 절반가량이었다. 카푸치노는 우유를 섞은 커피에 계핏가루를 뿌린 이탈리아식 커피. ‘원조 동네’인 이탈리아에서 마시는 첫 잔이라 그런지 맛이 일품이었다.
휴게소 여성 점원이 유창한 영어로 일본인이냐고 물었다. ‘이탈리아에는 아직 한류가 상륙하지 않았나….’ 한국인이라고 하자 곧바로 “오! 월드컵”이라고 하더니 연방 고개를 가로젓는다. 마치 ‘그때 토티의 퇴장은 오심인 거 알지?’ 하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AS로마 경기를 보러 간다고 하자 이내 표정이 밝아지면서 현재 팀의 주력 선수들을 열거했다.
로마의 플라미니오 빌리지 캠핑장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차에 부착된 내비게이션은 길을 잃었고 교통표지판은 알아보기 힘들었다. 늦은 밤이어서 길 위에는 ‘길거리 여성들’뿐이었다.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주변만 한 시간여 배회하니 이들조차 우리를 외면했다. 겨우 캠핑장에 도착했다. 신기하게도 화장실에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다. 시설이 훌륭했다.
세리에A 리그는 라이벌전을 제외하고는 매진되는 경우가 드물다고 해서 온라인 예매를 하지 않았다. 우리가 AS로마 경기를 보러간다고 하자 캠핑장 직원이 골대 뒤쪽의 ‘쿠르바 수드(Curva Sud·남쪽 관중석)’ 좌석을 사라고 종이에 써줬다. 값이 싼 데다 AS로마의 극렬 팬들과 함께 응원할 수 있다며 엄지를 추켜세웠다. 열성 서포터스의 지정석이기도 한 쿠르바 수드에선 응원이 과열되면서 폭력사태가 벌어지곤 한다. 폭죽 때문에 화재가 나서 사람이 죽기도 했다.
AS로마의 경기 입장권은 경기장이 아니라 로마시내 트레비 분수 인근의 ‘AS로마 스토어’에서만 판다. ‘로마의 휴일’에서 그랬던가. 동전을 한 개 던지면 사랑이 이루어지고 두 개를 던지면 로마를 다시 찾게 된다는 분수. 오드리 헵번을 머릿속에 그리며 동전을 하나만 던졌다. 너무 간절하게 비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는지 판매 마감시간보다 10분 늦게 도착했다. 한국에서 왔다며 표를 팔라고 매달렸지만 허사였다. 다음 날 다시 들르니 ‘아뿔싸’, 쿠르바 수드는 전석 매진. 안타깝지만 반대편 쿠르바 노르드(Curva Nord·북쪽 관중석) 표를 샀다. ○ 토티는 특별하다.
1일 AS로마의 홈구장인 스타디오 올림피코로 향했다. 경기시간이 가까워지자 팬들이 몰려든다. AS로마 유니폼을 입고 대형 깃발을 흔들며 트램(전차) 역에서 경기장을 잇는 다리를 건너오는 군중이 마치 출정하는 로마병사 같았다. 바르셀로나와 달리 부모와 함께 온 아이가 많았다. 몸에 맞지도 않는 유니폼을 입은 모습이 무척 귀여웠다. 토티가 유니폼을 받지 못해 아쉬워하는 아이들을 위해 유니폼 하의를 벗어준 일화가 생각났다.
세리에A의 팬들은 훌리건이 많은 유럽에서도 응원이 격렬하기로 악명이 높다. AC밀란의 브라질 골키퍼 디다가 경기 도중 관중이 쏜 폭죽을 맞아 쓰러지기도 했다. 이 때문에 경비가 삼엄하다. 경찰은 폭력성이 의심되는 사람을 입구에서 불러 세워 검사한다. 외국인은 표를 살 때 여권을 제시해야 한다. 매표원은 표 위에 여권의 영문 이름을 찍어 준다. 경기장 입구에서 다시 여권과 표를 대조해 이름이 일치해야만 들어갈 수 있다. 봐주는 건 없다.
쿠르바 노르드는 올림피코를 홈구장으로 같이 쓰는 SS라치오 팬들의 지정 응원석이다. AS로마와 라치오의 ‘로마 더비’가 벌어지면 양쪽 골대 뒤에서 양 팀 응원부대가 그야말로 ‘미친다’. 이날은 롬바르디를 본거지로 하는 아탈란타BC와의 경기였기 때문에 쿠르바 노르드도 AS로마 팬들로 가득했다. 쿠르바 수드만큼은 아니지만 이곳의 응원도 대단하다. 팬들이 대형 깃발을 90분 내내 흔들어 대는 통에 선수들이 잘 안 보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굉장한 볼거리다.
경기 시작 직전 관중이 모두 일어섰다. 무슨 일인가 싶은데 갑자기 웅장하게 ‘로마 로마 로마’로 시작하는 노래를 합창했다. 이 노래는 이탈리아 칸초네 가수 안토넬로 벤디티가 부른 곡으로 AS로마의 공식 노래란다. 아주 서정적인 발라드인데 경기장에서 들으니 마치 검투사들의 싸움을 앞둔 듯 사뭇 비장함이 배어 있었다. 반복되는 ‘로마 로마 로마’가 입에 달라붙어서 경기가 끝난 뒤 우리 입에서도 ‘로마 로마 로마’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황태자에 대한 대접은 남달랐다. 마지막 무대를 조용필이 장식하는 것처럼 경기장에서 마지막에 소개되는 선수는 언제나 토티. 장내 아나운서가 그의 이름 프란체스코를 선창하면 모든 관중이 “토티∼”라고 외친다. 경기도 토티가 중심이었다. 축구를 잘 모르는 사람이 봐도 ‘맏형’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다. 토티는 어슬렁거리면서도 ‘동생들’에게 날카롭게 패스를 넣어주며 3 대 1 승리를 이끌었다. 경기 후반 교체돼 운동장을 나갈 때도 기립 박수를 받았다. 가끔 상대방 선수에게 침을 뱉고 때리기도 하는 토티의 돌발 행동이 없어서 조금은 싱거운(?) 느낌이 들었다.
많은 사람이 오토바이나 스쿠터를 타고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우리도 ‘로마의 휴일’에서처럼 스쿠터를 타고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어쩌랴. ‘그레고리 펙’만 둘이다. ‘오드리 헵번’이 필요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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