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나무는 바늘잎나무(침엽수)이지만 특이하게도 따뜻한 곳을 좋아한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선 남부지방과 제주에서만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제주에는 단일 수종의 숲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인 비자림이 있다. 사계절 내내 초록빛 피톤치드를 한가득 쏟아내는 이 소중한 숲은 천연기념물 374호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다.
○ 꽃이 열매로 자라는 데 2년
이곳 숲에 살고 있는 비자나무는 2878그루다. 이렇게 정확한 수치는 나무마다 일련번호를 매겨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비자나무는 100년 동안 지름이 겨우 20cm 정도밖에 자라지 않는, 나이테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느리게 자라는 나무다. 그래서 당분간 비자림에는 새로 번호를 붙여줄 새 식구가 없을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비자림의 ‘1번 나무’는 누구일까. 전체 번호가 나이를 기준으로 붙여진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번호 1번은 제주에서 가장 고령인 ‘새천년 비자나무’가 갖고 있다. 고려 명종 20년(1189년)부터 살았다고 하니 800세가 훨씬 넘었다! 이 나무로부터 숲이 뻗어 나간 것으로 추측되어 ‘조상목’이라 불리기도 한다.
비자나무 꽃은 보일 듯 말듯 피어나고, 열매로 자라는 데 2년이라는 세월이 걸린다. 이 열매 안에 있는 씨앗을 비자라고 한다. 동의보감에는 비자를 하루 7알씩 일주일만 먹으면 기생충이 없어진다고 했다. 그래서 비자는 예로부터 구충제로 이용됐고, 씨에서 짠 기름은 먹거나 등잔불 기름으로 쓰였다.
또한 비자나무 하면 목재를 빼 놓을 수 없다. 고려사에는 비자나무 목재의 재질이 좋아 원나라에서 궁궐을 짓기 위해 가져갔다는 기록도 있다. 그중 가장 각광받던 쓰임새는 역시 바둑판이었다. 지금은 비자나무를 베어 바둑판을 만든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지금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억대를 호가하는 바둑판은 모두 비자나무로 만들었다고 한다. 과연 그런 귀한 바둑판 위에 놓는 한 수 한 수의 느낌은 어떨지 궁금해진다.
○ 영원한 사랑이 있기는 할까
제주 비자림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다른 하나는 ‘사랑나무’라 불리는 연리목이다. 나무는 접붙이기가 가능한 신비로운 생명체인데, 자연 상태에서 뿌리가 다른 두 나무가 서로 맞닿아 하나가 되기도 한다. 이런 현상을 연리(連理)라 하고 가지가 합쳐진 것을 연리지(連理枝), 줄기가 합쳐진 것을 연리목(連理木)으로 구분해 부른다. 보통 이렇게 나무가 하나로 합쳐진 것이 마치 부부가 만나 한 몸이 되는 것과 닮았다 해서 좋은 금실의 표상으로 여긴다. 사실 연리지나 연리목은 엄밀히 얘기하면 두 나무가 함께 살아남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인간과 자연의 관점의 차이는 이래서 늘 재미있다.
울창한 숲에는 잎들 사이를 통과한 가느다란 빛이 차분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일본 SF소설의 거장인 쓰쓰이 야스타카(筒井康隆)는 ‘멈추어 선 사람들’이란 단편소설에서 식물이 되어가는 인간의 모습을 다뤘다. 땅에 심어진 사람들의 다리에서 뿌리가 자라고, 서서히 기억을 잃어가며 나무가 되어간다는 내용이었다. 소설을 읽을 때는 죽음보다 무섭다는 고독의 세계를 만나는 듯한 느낌이 강했다. 하지만 지금은 나무가 되어가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했을지 알고 싶어진다.
나는 연리목을 보며 나무가 된 어느 연인을 상상해 봤다. 수백 년을 함께 서서 사계절을 맞으며 긴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건 행복일까, 아니면 불행일까! 옆에 있는 안내판에 씌어 있는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연리목에서 영원한 사랑을 빌면 소원대로 이루어집니다.’ 인간은 고사하고 나무조차도 영원히 살지 못하는데 과연 영원한 사랑이 있을까. 하지만 비자림 가득한 열매들을 보며 곰곰 생각해 보니 영원히 살아 있어야만 영원히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됐다. 생명체는 시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지속시키고, 사랑을 이어가는 방편을 갖고 있다. 바로 자식과 그 자손을 통해서다.
나는 숲에서 자라는 나무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지구 위에 사는 많은 사람을 생각했다. 먼 훗날에도 나무와 사람은 지금처럼 온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을 테고 사랑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겠지.
연리목 구멍 사이로 내려앉은 햇살이 나무를 보듬어 주는 듯 가지런하게만 느껴지던 가을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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