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추상표현주의 화가 로스코와 조수 2인극… 팽팽한 문답 통해 예술세계 풀어내
◇ ‘레드’ ★★★★
미국 추상표현주의 화가 마크 로스코의 심오한 예술세계를 팽팽한 2인극으로 풀어낸 ‘레드’. 도도한 자의식에 잡혀 고담준론을 쏟아내는 로스코 역의 강신일 씨(왼쪽)와 그에 주눅 들지 않고 로스코 예술세계의 진가를 발견해가는 조수 켄 역의 강필석 씨. 신시컴퍼니 제공
미국 추상표현주의 화가 마크 로스코의 그림을 접한 사람의 반응은 둘 중 하나다. 어린애 장난 같다고 어깨를 으쓱하며 지나치거나, 뭔가 심오함이 숨어 있다고 믿으며 숨을 멈추거나. 만일 당신이 후자라면 이 연극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연극은 로스코의 생애를 훑지 않는다. 예술가의 변덕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는 중년시절의 한 사건에 초점을 맞춘다. 1958, 59년 뉴욕 파크 애버뉴에 지어진 시그램 빌딩에 들어설 ‘포시즌 레스토랑’의 벽화를 의뢰받고 40여 점의 연작을 완성했다가 돌연 계약을 파기했던 사건이다. 시그램 빌딩은 그와 동년배이면서 현대건축의 아버지로 꼽히는 미스 판 데어 로에와 필립 존슨이 손잡고 지은 기념비적 건물이다.
‘도대체 그는 왜?’ 극의 구조는 바로 이 질문에 기반을 둔다. 하지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그의 독창적 예술세계에 대한 이해가 필수다. 로스코와 그의 조수 켄이 등장하는 이 2인극은 이를 팽팽한 긴장의 문답법으로 풀어간다.
극의 대부분에서 이 문답을 진행하는 사람은 로스코다. 성공한 예술가로서 자부심과 강렬한 자의식을 지닌 그의 질문은 대부분 관객을 겨냥한다. 가상의 조수 켄은 관객을 대신해 그 질문에 답하다 계속 면박만 당한다.
극작가 존 로건의 분신인 켄은 그렇게 ‘깨지고 부서지면서’ 미술사에서 로스코가 개척한 독특한 위상을 발견해 간다. 피카소와 마티스의 큐비즘이 공간의 봉인을 풀어버림으로써 시간의 움직임을 포착했다면 잭슨 폴록과 로스코의 추상표현주의는 시간의 사슬에서조차 해방된 공간에 생명력을 부여했다. 로스코는 “우린 큐비즘을 짓밟아 숨통을 끊어 버렸다”며 “자식은 아버지를 몰아내야 해. 존경하지만 살해해야 하는 거야”라고 선언한다.
그렇다면 폴록과 로스코의 차이는 뭘까. 켄은 니체의 ‘비극의 탄생’을 빌려 디오니소스적인 감정의 예술가로서 폴록과 아폴론적인 지성의 예술가로서 로스코를 발견한다. 하지만 로스코는 틀렸다고 말한다. 자신과 폴록이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의 불가능한 균형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똑같이 ‘비극적’이란 것이다. 다만, 폴록은 너무 유명해지는 바람에 그 비극을 감당할 수 없어 일찍 무너졌을 뿐.
어쩌면 로스코와 폴록은 ‘이란성 쌍둥이’ 아닐까. 연극의 제목 레드의 비밀이 거기에 숨어 있다. 극중 로스코는 자신의 그림 속 레드와 블랙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삶에서 두려운 게 딱 하나 있거든. …그건 언젠가 블랙이 레드를 삼켜 버릴 거라는 거야.”
극의 후반부터 켄은 이를 파고들면서 매서운 역공을 펼친다. ‘레드=생명’ ‘블랙=죽음’이란 도식의 진부함에 대한 공격이다. 로스코는 이런 공세에 한발 두발 물러선다. 켄은 급기야 앤디 워홀로 대표되는 ‘팝 아트’의 도래에 분개하는 로스코에게 “이젠 선생님이 퇴장할 차례네요. 팝 아트가 추상표현주의를 몰아내 버렸거든요”라는 치명타를 날린다.
켄의 역공은 집요하다. 로스코가 경멸하는 돈 많은 속물들의 공간에 자신의 그림을 전시하려는 자체가 위선이라고. 심지어 그 전시가 ‘소비의 사원’을 ‘명상의 예배당’으로 바꾸기 위한 악의에 찬 선물이라는 로스코의 변명에 대해서도 자신의 작품을 자식처럼 사랑하는 사람답지 않은 자기기만이라고 몰아붙인다.
치열한 사제 간의 논쟁은 청출어람의 결론으로 막을 내린다. 진짜 감동은 그 뒤에 찾아온다. 비록 모사품이지만 공연이 끝난 뒤 한참 동안 어두운 조명 아래 캔버스 속 레드와 블랙의 꿈틀거림을 체험하게 함으로써 로스코 미술의 진가를 확인시켜 준다.
연극은 강한 레드에 대한 찬가로 끝난다. 하지만 실제는 어떨까. 로스코는 말년에 자신의 그림들을 위한 진정한 공간을 텍사스의 한 교회에서 찾아낸다. 훗날 ‘로스코 처치’라고 명명된 그 교회의 벽화는 온통 블랙이다. 블랙이 레드를 삼켜버린 그 작품을 남기고 로스코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로스코 역의 강신일 씨는 딱 맞는 의상을 입은 듯한 연기를 펼쳐 보인다. 하지만 배우로서 더 힘든 역은 강필석 씨가 연기한 켄이다. 작가가 연극을 위해 창조한 가상의 인물로서 관객을 대신해 장면에 맞춰 변신을 거듭해야 하는 변칙적 연기를 펼쳐야 하기 때문이다. 극 중간 그런 두 배우가 합심해 하얀 캔버스 가득 빨간 바탕색을 칠하는 장면이 강렬하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i: 2010년 미국 토니상 작품상 수상작. 오경택 연출. 11월 6일까지 서울 필동 동국대 이해랑예술극장. 4만 4000원. 1544-1555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