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연극이 힘들고 배고픈 길이라 했던가. 연출에 입문한 지 50주년을 맞아 다음 달 100번째 연출작을 무대화하는 이 다복한 노(老)연출가 앞에선 무색해질 얘기다. “남들이 나보고 자꾸 예술 연출가라고 해요. 하지만 나만 한 흥행 연출가도 드물어요. 내가 연출한 100편 중에 손해를 본 것은 두 편밖에 안 되거든요.” 다음 달 23일 연극 ‘흑인 창녀를 위한 고백’을 올릴 원로 연출가 김정옥 씨(79)는 예상하지 못한 말로 입을 열었다.》 그가 내민 A4 종이 넉 장엔 1961년 5·16군사정변 직후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국내 초연된 그리스 희극 ‘리시스트라다’를 필두로 2007년 일본 고베 아시아연극제에서 공연된 연극 ‘국밥’까지 그가 연출한 작품 99편의 목록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연극 오페라 창극 무용극 영화(‘바람 부는 날에도 꽃은 피네’)를 모두 넣었더니 딱 99편이더군요. 연극은 재공연된 게 워낙 많아서 극단이 달라졌다거나 연출 스타일을 확 바꾼 경우만 넣었어요. 그중에 적자가 나서 내 호주머니 돈을 털어 넣어야 했던 작품은 1994년 공연된 음악극 ‘바람 타오르는 불길’과 2006년 공연된 연극 ‘따라지의 향연’뿐이었어요.”
미심쩍었지만 노장의 행복한 추억에 굳이 소금을 뿌리고 싶지 않았다. 눈치 챈 것일까. 노장은 구체적 사례를 들기 시작했다. 1963년 이오네스크의 부조리극 ‘대머리 여가수’를 국내 최초로 소개할 때 극단에선 관객이 어려워할 것이라며 난색을 표했지만 흥행에 성공했다. 1969년 ‘흑인 창녀를 위한 고백’을 초연할 때도 제목은 너무 직설적인 반면에 대사가 너무 길고 무겁다는 회의적 목소리가 많았지만 관객몰이에 성공했다. 소설가 최인훈 씨의 첫 희곡 ‘평강공주’를 ‘반(反)사극’의 기치 아래 무대화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1970년)는 초연 때 각종 상을 휩쓸면서 재공연 때 전석 매진의 기록을 세웠다.
비결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늘 새로운 것을 원하는 관객의 갈증에 부응하는 것”이란 간명한 답이 돌아왔다. 이는 그의 배우론으로 이어졌다.
“배우는 보통 둘 중 하나죠. 변신을 잘하는 배우와 개성이 강한 배우. 진짜 배우라면 둘 다 겸비해야 합니다. 개성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배역에 맞춰 변신할 줄 아는 배우죠. 여기에 배우들이 가장 소홀하게 여기는 세 번째 요소가 더해져야 합니다. 바로 관객을 지루하게 만들지 않는 엔터테이너 기질입니다.”
그는 이번 공연을 준비하면서 그런 배우를 만났다고 말했다. 살인죄로 사형 선고를 받은 창녀 출신 흑인 하녀 낸시를 구명하기 위해 자신의 치욕스러운 과거를 털어놓는, 여주인 템플 역의 김성녀 씨다.
“우리 배우들 중에 개성과 변신을 모두 갖춘 배우는 많아도 사실 엔터테이너의 자질까지 갖춘 배우는 많지 않아요. 그런데 김성녀 씨는 우리 전통의 마당놀이를 오래 한 덕인지 그 셋을 모두 갖췄어요.”
‘흑인 창녀를 위한 고백’은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을 알베르 카뮈가 극화한 작품(원제 ‘어느 수녀를 위한 진혼곡’)이다. 프랑스 유학생 출신인 김정옥 씨 본인의 번역으로 국내 초연된 뒤 1978년까지 꾸준히 공연됐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 이후엔 무대화되지 못했다.
“내가 추구하는 연극의 전범(典範)과 같다는 생각에 고민 끝에 골랐어요. 관객에게 그 다음을 예측할 수 없는 긴박감을 안겨주면서도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거는 듯한 희랍극의 요소를 갖추고 있죠. 게다가 길면서도 아름다운 문학적 대사까지….”
50대에 예술원 회원이 되고 60대엔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까지 지내는 관운도 누린 그는 그 모든 게 연극 때문 아니겠느냐며 껄껄 웃음을 지었다.
“돌이켜보면 나처럼 허술한 사람의 작품 목록이 100편에 이르게 된 것도, 혼자 작업하는 시나 소설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함께하는 연극을 만났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시나 소설은 쓰겠다고 해놓고 계속 미뤄둘 수 있지만 연극은 여러 사람과의 약속이니까 지키지 않을 도리가 없잖소.”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i: 1969년 초연 때 간수 역으로 출연했던 권병길 씨가 같은 배역을 맡고 흑인 창녀 낸시 역은 전국향 씨가 맡는다.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2만∼5만 원. 02-3668-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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