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사케 한잔… 샤케 한점… 술 빛는 겨울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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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0월 28일 03시 00분


일본 니가타 사카쿠라(양조장) 투어

이 잔 하나로 천 가지 사케를 맛볼 수 있다면. 꿈같은 이야기지만 분명한 사실이다. 그곳은 일본 전국에서 고급 사케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니가타 현 주조조합이 매년 3월에 이틀간 여는 신주시음회장 ‘사케노진’. 2000엔만 내고 입장하면 95개 사카쿠라(양조장)가 제각각 부스에 전시한 모든 술을 맛보고 살 수 있다. 이 사케 시음 전용 잔 겉면에 쓰인 ‘니가타 단레이’는 ‘산뜻하고 화려하면서 무겁지 않은 니가타 사케’의 맛을 뜻하는 공식 로고다. 니가타 =조성하 기자 summer@donga.com
이 잔 하나로 천 가지 사케를 맛볼 수 있다면. 꿈같은 이야기지만 분명한 사실이다. 그곳은 일본 전국에서 고급 사케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니가타 현 주조조합이 매년 3월에 이틀간 여는 신주시음회장 ‘사케노진’. 2000엔만 내고 입장하면 95개 사카쿠라(양조장)가 제각각 부스에 전시한 모든 술을 맛보고 살 수 있다. 이 사케 시음 전용 잔 겉면에 쓰인 ‘니가타 단레이’는 ‘산뜻하고 화려하면서 무겁지 않은 니가타 사케’의 맛을 뜻하는 공식 로고다. 니가타 =조성하 기자 summer@donga.com
《일본의 10월은 술 빚기가 시작되는 계절. 여름내 쉬었던 사카쿠라(酒藏·양조장)는 쌀을 씻어 찌고 누룩을 만들어 발효시키느라 분주해진다. ‘니혼슈(日本酒)’라고도 불리는 대표적인 일본 술, ‘사케(酒)’. 혼슈 동해안의 니가타 현은 일본의 3대 명산지 가운데 하나로 95개 사카쿠라에서 1000여 종의 술을 생산한다. 그런 니가타의 명품 사케를 음식과 더불어 맛볼 사카쿠라 투어로 안내한다.》
니가타 시 남쪽의 데라도마리. 해변 포구에 자리 잡은 이름난 수산물시장이다. 시장은 도로가에 대게 모형을 내건 건물에 있다. 1층은 생선가게(열두 곳), 2층은 해산물 식당. 진열대마다 갓 잡은 생선이 넘쳐났다. 어종은 대게, 오징어 등 우리 동해안과 별차 없다. 대체로 동해산이다. 그 데라도마리에서 꼭 맛볼 게 있다. 하마야키라는 생선 꼬치구이다. 너도나도 한 개씩 들고 다니며 장을 본다. 대게라면도 먹음직스럽다.

해안 북쪽을 보면 야히코라는 야산이 있다. 125년 역사의 다카라야마슈조(酒造)가 자리 잡은 산이다. 이곳은 니가타 현이 자체개발한 주조전용 쌀 ‘고시단레이’로만 술을 빚는다. 거기서 최고급주인 다이긴조슈(大吟釀酒·60% 이상 깎아낸 쌀로 빚은 술)를 맛봤다. 정숙하면서도 상큼한 향이 일품이다. 신임 총리의 취임식에 공식 축하주로 쓰이는 명주다. 이곳에선 아직도 고급주(긴조슈 이상 등급)만큼은 손으로 쌀을 씻고 가장 추운 날을 기다렸다가 누룩을 만든다. 균주도 4대째 대대로 집안의 한 방에 모시고 있다. 건물은 100년 넘은 고옥(국가유형문화재 지정)인데 정원도 고풍스럽다. 방문객에겐 시음용 술을 종류대로 낸다.

그날 밤 다카라야마슈조 근방 이와무로 온천에서 묵었다. 숙소는 다카시마야(高島屋)료칸. 이 집도 예사롭지 않았다. 250년 전 9대조가 지었다는데 1615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공격을 피해 오사카에서 이주해 정착했단다. 지금 주인은 18대손. 그날 저녁식사 상에 지자케(地酒·그 지역 술)인 다카라야마슈조 것이 올랐음은 물론. 낮에 시음한 것과 같은 것인데 지난해 전국신주품평회 금상 수상품이었다.

한겨울 연어마을 무라카미에서만 만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풍경. 집집마다 이렇게 처마 밑에 연어 몇 마리 씩은 걸려 있다.(왼쪽) 에치고유자와 역 구내 특산품 매장인 ‘폰슈칸’ 사케 상점 앞 취객 인형. 1인당 사케 소비량 전국 1위, 고급 사케 생산량 1위의 니가타 현을 잘 말해 준다.(오른쪽)
한겨울 연어마을 무라카미에서만 만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풍경. 집집마다 이렇게 처마 밑에 연어 몇 마리 씩은 걸려 있다.(왼쪽) 에치고유자와 역 구내 특산품 매장인 ‘폰슈칸’ 사케 상점 앞 취객 인형. 1인당 사케 소비량 전국 1위, 고급 사케 생산량 1위의 니가타 현을 잘 말해 준다.(오른쪽)
사케의 광팬 로버트 드니로
이튿날 니가타 시 여객선에 올라 32km 바다 건너 사도(佐渡) 섬으로 건너갔다. 이 섬은 과거 교토에서 옮겨온 귀족들로 인해 형성한 고급문화 덕에 ‘작은 교토’로 불리는 곳. 그래서 사카쿠라도 일찍부터 발달(총 7개)했다. 그중 오바타슈조(尾畑酒造)와 호쿠세쓰슈조(北雪酒造)는 세계적 명성의 양조장이다. 전체가 험준한 산악인 섬은 일주도로를 달리는 내내 멋진 풍광을 선사했다. 오바타슈조는 오바타 루미코 전무가 대물림해 남편과 함께 운영 중이다. 오바타 전무는 2001년 사케가 역사상 처음으로 기내서비스용 술 목록에 들도록 한 주인공. 현재 에어프랑스 베트남항공 등의 1·2등석에 제공되는 ‘마노쓰루’(眞野鶴·다이긴조슈)가 그것이다. 화려한 과실 향과 더불어 짙은 풍미가 일품인 이 술. 한번 마시면 절대 잊지 못할 만큼 향과 맛이 인상적이다.

이어 차로 10분 거리의 호쿠세쓰슈조를 찾았다. 이곳도 사케 마니아 사이에서는 화제가 되는 양조장이다. 할리우드 스타 로버트 드니로, 전 세계 27개 대도시에 진출한 일식당 ‘노부’의 창업자이자 세계적인 요리사 노부유키 마쓰히사, 그리고 코미디언을 방불케 하는 코믹한 외모와 뛰어난 비즈니스 감각의 소유자 하즈 후미오 사장 등 세 사람이 그 주인공. 하루는 드니로와 노부유키가 이곳을 찾았다. 노부유키로부터 드니로를 소개받은 하즈 사장은 사케를 마시며 밤을 새웠고 이튿날 친구가 된 그는 그들이 떠나기 전 한 가지 약속을 한다. 새 술을 만들어 노부유키와 드니로를 위해 제공하겠다는 것인데 그게 한국 등 일본 밖에서는 ‘노부(NOBU)’, 일본에서는 ‘YK35’로 유통되는 다이긴조슈다. 드니로는 뉴욕 소재 노부 레스토랑의 주인이자 노부유키의 광팬이다.

니가타 시로 돌아와 이번에는 북쪽 무라카미로 향했다. 역시 동해안인데 두 가지로 이름난 맛의 고장이다. 하나는 연어고 또 하나는 ‘무라카미 규’로 통용되는 와규다. 특히 이곳은 연어요리에 관한 한 일본 최고의 명성을 갖고 있다. 세계 최초로 인공 부화시킨 치어 방류가 배경이다. 이곳 겨울풍경은 특별하다. 집집마다 처마 밑에 대형 연어가 걸려 있다. 겨울바람(북서풍)에 말리는 과정이다. 말린 연어는 ‘사카비타시’(칼로 얇게 저민 연어 포)로 환생한다. 사케 애호가가 최고의 안주로 치는 음식이다.

연어로 100가지 요리를 만든다는 무라카미. 내가 찾은 9월은 연어잡이철(10∼3월)이 아니어서 그 진수를 맛보진 못했다. 그래도 명성을 확인하기엔 충분했다. 취재 현장은 료테이(料亭) 노토신(熊登新). 료테이는 가정집 스타일의 고급요리 전통식당으로 ‘방만 없는 료칸’ 격이다. 점심상에 연어의 머리와 내장(정소와 심장, 간), 알을 소재로 한 다양한 요리가 연어 회(날것, 익힌 것)와 구이, 찜과 함께 그득히 올랐다.

처마 밑에서 1년 내내 말린 연어의 살을 저며 내는 사카비타시. 먹기 직전 사케를 부어 부드럽게 만드는데 사케 안주로 최고다.
처마 밑에서 1년 내내 말린 연어의 살을 저며 내는 사카비타시. 먹기 직전 사케를 부어 부드럽게 만드는데 사케 안주로 최고다.
청초한 뒷맛의 ‘다이요자카리’
‘사카비타시’도 있었다. 사카비타시는 먹기 직전 사케를 약간 부어 부드럽게 한다. 이 맛을 처음 본 건 5년 전 무라카미 첫 취재 때. 이후 전국의 사카쿠라를 취재하며 여러 음식과 사케의 조합을 체험했지만 이것만큼 사케의 풍미를 돋우는 안주는 없었다. 연어의 일본어 발음 역시 ‘사케’. 그래서 니가타에서는 ‘사카’ 혹은 ‘샤케’(연어)라는 차별된 발음으로 사케(술)와 혼동을 피한다.

이날은 사카비타시를 안주로 다이요슈조(大洋酒造)의 ‘다이요자카리’(大洋盛·다이긴조슈)를 마셨다. 이 술 역시 니가타 현이 자체 개발한 주조미 ‘고시단레이’를 수작업으로 양조한 것인데 화려하지 않고 부드럽게 감도는 청초한 뒷맛과 여운이 인상적이었다. ‘기모노 차림의 여인에게서 풍기는 그윽한 풍모 같다’고 호평을 받는 고급술이다.

다이요슈조는 무라카미 중심가에 있었다. 1층 실내는 ‘나고미쿠라’라는 이름의 전시장 겸 판매장이었다. 그곳 시음대에서 마음껏 술을 맛보았다. 그런 중에 뜻밖의 술을 발견했다. 알코올 도수 19%의 ‘나마겐슈’(生原酒·발효가 끝난 상태에서 찌꺼기만 걸러낸 생술)인데 냉장탱크의 원액을 파이프로 뽑아 올려 손님 앞에서 병에 넣어 팔았다. 생술은 발효균을 거르거나 죽이지 않은 것. 그래서 상온에 두면 변질되기 때문에 보관이 까다로운데 그래도 술꾼은 이 술을 찾는다. 상큼하고 진한 맛 때문이다. 나마겐슈는 흔치 않다. 그걸 현장에서 병입 판매하는 것은 더더욱 드물다.

니가타 취재 마지막 날. 사카쿠라 투어의 피날레를 장식할 멋진 순서가 기다렸다. ‘기타야마’라는 식당에서 사케 시음을 겸한 정찬이었다. 이게 기대를 모은 이유는 분명했다. ‘사케의 요코즈나’라 할 명품 ‘고시노칸바이’(越寒梅)의 양조원 이시모토(石本)슈조(1908년 니가타 현 이시모토에서 창업)가 직영하는 고급레스토랑이어서다. 실내는 화려하지 않으면서 고풍스러웠다. 그 고품격의 식당 한쪽 벽에 이시모토슈조의 모든 술이 진열돼 있었다. 이집 술은 본산인 니가타에서도 못 구할 경우가 많다. 공급이 수요를 따르지 못해서다. 심지어는 다른 술을 끼워 파는 곳도 있다.

이날은 음식코스별로 술도 바뀌었다. 가이세키 요리의 첫 잔은 언제나 달콤한 식전주다. 기타야마에서는 우메슈(매실주)를 냈다. 6월 수확한 매실로 12월부터 1200병만 빚어 판매하지 않고 자체에서만 소진하는 한정주였다. 본 요리가 나오면서 술은 사케로 바뀌었다. 고시노칸바이 다이긴조슈는 정미보합 30%(쌀알의 70%를 깎아냄)의 초특선. 잔도 특별했다. 니가타 수공업 장인의 본산 산조·쓰바메 시에서 만든 수제 구리잔이었다. 금과 구리잔에 사케를 따르면 맛도 훨씬 좋아진다. 이곳은 노벨상 수상식장의 정찬에 사용하는 식기 생산지로 이름난 장인도시다.

니가타에서 사케와 음식은 둘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돋보이게 해서다. 니가타 사람들은 말한다. ‘우마사 기치리 니가타’라고. 이 말은 ‘맛이 꽉 찬 니가타’라는 뜻. 사케든 음식이든 사람이든 자연이든, 니가타에서는 뭐든 더 이상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다는 함의다. 음식과 술 여행지로 이만한 곳이 또 있을지. 술 빚는 겨울이 더더욱 기다려진다.

니가타=조성하 여행전문기자 summ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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