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스트는 중세 유럽의 인기 레퍼토리였다. 세상 모든 학문을 섭렵한 학자와 약아빠진 악마의 내기에서 누가 승리할 것인가라는 주제는 대중의 호기심을 한껏 자극하는 ‘빅 매치’였기 때문이다. 괴테는 이 대중적 스토리를 새롭게 엮어서 모순과 역설의 레제드라마(공연보다 독서를 목적으로 쓴 희곡)를 써냈다.
지난달 27∼30일 서울 LG센터에서 공연한 아이슬란드 베스투르포트 극단과 레이캬비크 시극단의 ‘아크로바틱 파우스트’는 이런 괴테의 파우스트를 대중적인 서커스 분위기로 되돌려놓았다. 무대는 1층 객석 위를 가득 덮은 대형 그물로 확장됐다. 배우들은 무대 밑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와이어액션을 펼치는가 하면 까마득히 높은 천장에서 그물로 수직 낙하하는 악마적 유희로 관객을 한껏 희롱했다. 파격적인 무대연출로 유명한 체조선수 출신 배우이자 연출가인 기슬리 외른 가르다르손(38)의 작품답게 확실히 재기가 넘쳤다.
그는 이런 무대의 의외성과 역동성을 더욱 부각하기 위해 극의 무대를 양로원으로 설정했다. 한때 유명 연극배우였던 요한(소르스테인 구나르손)은 크리스마스이브에 갈 곳 없는 노인들과 함께 양로원을 지키고 있다. 수많은 배역을 맡았던 그는 마지막으로 꼭 해보고 싶은 배역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 “사랑과 욕망을 위해 모든 걸 거는 한 남자의 동화 같은 얘기”의 주인공 파우스트를 해보고 싶다고 답한다.
그는 방문객과 간호사마저도 떠난 뒤 양로원 동료인 머스가 휠체어에 앉은 채 쓸쓸히 숨을 거두는 것을 보고 크리스마스트리 전깃줄에 목을 매 자살을 기도한다. 그 순간 죽은 머스 속에서 악마 메피스토(매그너스 존슨)가 튀어나온다. 그는 요한을 파우스트라고 부르면서 “세상은 너의 무대이다, 파우스트. 네가 맡기 위해 태어난 역할을 연기해”라고 말한다.
꿈인가 현실인가 어리둥절해진 요한은 마지막 배역으로서 파우스트 역을 받아들인다. “세속적인 기쁨 따위로 내가 무릎 끓고 기도하는 걸 보는 일은 없을 거야”라면서 메피스토와 피의 계약서에도 서명한다. 자, 이제 누가 남았는가. 유혹과 구원의 여인 그레트헨이다. 그레트헨 역은 양로원의 젊은 간호사 그레타(온누르 외스프 스태판스토티르)의 몫이다.
연극은 그렇게 파우스트의 내용을 현대화하면서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요한 역을 맡은 노배우 구나르손을 제외하고 양로원 노인 역을 맡았던 배우들이 악마나 그의 부하들로 변신해 뛰고 구르고 날며 일대 난장을 펼친다. 마녀들이 등장하는 ‘발푸르기스의 밤’ 장면에선 스트립댄스까지 등장한다.
하지만 그런 볼거리에 밀려 원작의 깊은 묘미도 사라져버렸다. 1막에서 ‘파우스트’와 ‘맥베스’ 등 다양한 고전을 적절히 인용하면서 제법 깊은 맛을 내던 연극은 2막에서 젊은 여인을 향한 노인의 진부한 로맨스로 전락한다. 요한은 그레타에 대한 지고지순한 사랑을 지키려 원작보다 훨씬 더 빨리 “이게 바로 내가 원하는 거야”를 외쳤다가 바로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긴다.
그와 함께 평범함을 비범함으로 바꿨던 괴테의 노력도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같은 북유럽의 연극이지만 2009년 같은 공연장에 올랐던 리투아니아 연출가 네크로슈스의 ‘파우스트’와 비교하자면 청소년용 축약본이나 다름없게 느껴졌다.
모든 이야기를 러브 스토리로 단순화하되 시각적 볼거리를 최대한 강조하라는 ‘할리우드 문법’은 이제 연극의 본령 깊숙이까지 침투했다. 영어로 진행된 연극 속 대사 중엔 바하 멘의 팝송 제목을 패러디한 “후 렛 더 도그스 아웃(누가 개를 풀어놨어)”이 있다. 연극을 보고 난 뒤 기자의 심정을 대변하는 대사였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i: 4, 5일 경남 진주의 경남문화예술회관에 서도 공연한다. 4만∼5만 원. 1544-6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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