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晩秋). 절정에 이른 단풍이 얕은 바람에도 흐트러지듯 마음 한편이 아쉬워오는 계절이다. 깊은 가을밤, 별빛에 의지해 소나무숲길을 걷는 일은 쉬 누릴 수 없는 호사다. 더하지 않아 빛나는 그런 곳이 우리네 주변에 얼마나 되겠는가. 가로등 불빛이 더해지지 않아서 별이 더 빛나고, 인가의 기척이 없어 개울물소리가 더 맑다.
음식도 그렇다. 부러 맛을 더하지 않아야 원 재료의 맛깔이 진하게 감도는 법이다. 밥상을 차린 이의 정성이 그대로 전해져서일까. 절제된 맛이 주는 감동은 특별하다. 마치 화폭에 남겨진 여백처럼….
지난달 30∼31일 동아일보 주말섹션 ‘O₂’가 따라간 길은 이런 감동을 찾는 여정이었다. 예천군, 영양군, 봉화군 등 경북 북부는 예나 지금이나 지리적으로 고립된 곳이다. ‘육지 속의 외딴섬’이라 불릴 정도. 외부와의 오랜 단절, 양반 중심의 유교적 문화색채, 부족한 곡식을 대신하는 풍족한 산나물 등은 이곳만의 독특한 음식문화를 만들어냈다. 최소한의 양념, 최소한의 기교로 만든 맑음과 정갈함이 그것이다. 궁중음식연구가인 한영용 청운대 겸임교수(42·식품영양학)와 김기웅 잭니클라우스골프클럽 F&B총괄팀장(41)이 ‘음식불모지’로 오해받는 경북 음식을 재발견하는 도우미를 자청했다.
가마솥처럼 뜨거웠던 할머니 밥상
“할머니는 제게 정신적 스승입니다. 음식에도 혼이 있는데, 이 혼은 음식이 아닌 음식을 만든 사람에게서 나온 거죠. 할머니를 만나면 내게도 그런 혼이 있을까, 나의 음식에서는 어떤 혼이 배어나올까 되돌아보게 됩니다.” -한영용 교수
해와 달을 함께 볼 수 있다 하여 ‘일월(日月)’이라 불리는 높이 1219m의 산. 이 산 700m 고지에 이을옥 씨(76) 집이 있다. 차로 30여 분 거리에 있는 유일한 인가다. 35년 전 인근 10여 가구가 모두 산을 떠났을 때도, 21년 전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할머니는 일월산을 떠나지 않았다.
“시간을 마차 왔시믄 더 맛날텐데, 백숙은 너무 오래 되믄 질겨가….”
한 교수는 이 씨를 ‘할매’라 부른다. 자주 보진 못해도 그만큼 친근하단 얘기다. 장정이 다섯이나 들이닥쳤는데도 불편한 기색은 없다. 약속시간을 넘겨 도착한 외지인에게 외려 밥상이 누추할까 걱정스러운 표정이다. 토종닭 40여 마리를 키우던 이 씨는 최근 대부분의 닭을 산짐승에게 잃었다. “지금 가고 있다”는 갑작스러운 통보에 겨우 살아남은 4마리 중 2마리를 주저 없이 가마솥에 넣었다. 이 씨는 “지대로 할라믄 가마솥서 삶아야제”라며 불빛 하나 없는 아궁이 주변을 그렇게 지키고 서 있었다. 닭백숙에 특별한 게 들어가진 않았다. 음나무, 황기, 대추 등에다 생강과 양파, 마늘을 조금 넣어 1∼2시간을 푹 삶았다고 했다. 물론 직접 키우거나 산에서 캔 것들이다.
다른 말은 필요가 없었다. 한마디로 끝내주는 맛이었다. 요리전문가인 김 팀장이 조금 더 상세히 감동을 표현했다.
“산에서 방목하는 토종닭이어서 육질도 좋지만, 재료 본연의 맛을 즐길 수 있었던 게 가장 인상적이네요. 오로지 닭 그 자체의 맛을 낸 거죠. 육수도 보통은 조금만 식어도 느끼한데 얼마나 깔끔한지 전혀 거북하지 않네요.”
이 씨는 한 번 읍내로 나가려면 택시를 대절해야 한다. 편도 3만 원이고, 집까지 다시 오려면 5만∼6만 원은 쥐여 줘야 한다. 그래도 할머니의 밥상이 그리워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어 쉽게 이 오지를 떠나지 못한다. 1년 전 허리디스크 수술을 한 뒤 인천의 병원에서 겨울을 꼬박 보내고서도 셋이나 되는 아들네 집을 마다하고 일월산으로 돌아왔다.
“나(이)가 드니께 나도 힘들어요. 그래도 이래 맛있다고 찾아오니께 우째야 할지….”
음식이 이어준 인연은 참 묘하다. 사람들은 음식을 잊지 못해 그를 찾고, 그는 또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간다. 그가 언제까지 그 집을 지킬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몇몇에겐 일월산과 할머니, 그리고 할머니의 백숙은 동의어가 됐다.
야산에서 밥상을 쇼핑하다
‘음식은 소박할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또 날것일수록 좋고, 섞지 않을수록 좋다. 이런 식으로 먹으면 준비가 간단해지고, 조리가 간단해지며, 소화가 쉬우면서 영양가는 더 높고, 건강에 더 좋고, 돈도 많이 절약된다.’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 중에서
주인장이 커피를 내왔다. 내비게이션에도 나오지 않는 산장을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한밤중에 낭떠러지 바로 옆 산길도로를 오르던 중 차바퀴가 빠져 한참을 고생해야 했다) 겨우 찾아왔는데, 광화문 주변에 널리고 널린 커피를 또 마셔야 하다니. 얼굴에 실망스러움이 묻어나려던 순간 ‘민들레커피’라는 소개에 귀가 쫑긋해졌다. 잘 말린 민들레뿌리를 살짝 볶은 뒤 잘게 빻으면 커피가루와 다름없다고 했다. 실제 민들레커피의 맛은 커피와 흡사하면서 오히려 고소한 맛이 더 강했다. 야산에서 쉽게 구할 수 있고, 카페인 중독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니 금상첨화가 아닌가.
‘오렌지꽃향기는 바람에 날리고’라는 긴 이름의 산장을 운영하는 김두한(50) 이영희 씨(52) 부부는 2년 전 이곳 봉화군 명호면으로 귀농했다. 큰딸(대학 4년)은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막내아들(고 2년)마저 만화를 공부하겠다며 기숙사학교인 울산애니원고에 진학하자 부부는 당장 꿈을 실천에 옮겼다. 대구에서 운영하던 음식점은 아예 매니저에게 맡겼다.
손님을 받은 지 채 2년이 안 됐지만 ‘오렌지…’는 꽤 유명한 곳이다. 아침 안개가 걷힌 뒤에 드러나는 청량산의 자태가 매혹적이기도 하지만, 주인장이 직접 차려주는 ‘잡초밥상’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남긴다. 곤드레·당귀무침, 참외장아찌, 사과깍두기, 민들레·달래무침, 냉이무침, 까마귀오줌통무침…. 안동 간고등어 구이가 왠지 사치스러워 보일 만큼 산나물 일색이다. 재료는 부부가 산장 인근에서 직접 캔 것들이다. 실제 산장 뒤쪽엔 산수유나무 사이사이로 당귀, 냉이, 잔대, 산박하 등 자연산 약초들이 파릇파릇 자라 있었다.
“지난해 산장 문을 열고 난 뒤 모든 손님에게 이곳 음식을 맛보게 해주고 싶었어요. 제가 산에서 캔 약초들로 밥을 해드리는 거죠.”
한 번은 손님이 직접 싸온 음식을 먹겠다고 하기에 허락했는데, 죄다 도시에서 흔히 먹던 것뿐이더란다. 안타깝기도 하고, 쓰레기 처리도 곤란해서 이후로는 아예 취사를 금지했다. 김 씨는 산장으로 옮겨오면서 자신들의 인적 네트워크가 더 풍부해졌다고 강조한다. 지리적으로는 고립됐지만, 예전에는 자신이 찾아가도 만나지 못할 사람들이 이제 제 발로 찾아오곤 한다는 거다.
“저 꼬불꼬불한 산길이 사람들을 걸러주는 것 같습니다. 아무나 지나다 쑥 들어올 수 있는 곳은 아니니까요. 여기로 오는 사람들은 우리를 만나고 싶었거나 자연이 너무 좋아서 저 험한 길을 마다않고 오는 사람들일 테죠.”
▼오지백숙-잡초밥상-송이밥에 신선이 안 부럽네▼
절제하기에 더욱 돋보인다
‘땅이 메마르고, 기후는 추우며, 간전(墾田)이 1천6결이다. 토의(土宜)는 벼·기장·조·보리·왕골이요, (중략) 약재(藥材)는 웅담(熊膽)·인삼·백복령이요, 토산(土産)은 신감초(辛甘草)·송이버섯·은구어이다.’ ―‘세종실록지리지 5집 645면, 경상도/안동 대도호부/봉화현’ 중에서
봉화는 전국 송이 생산량의 10%가 나는 ‘송이의 고장’이다. 소나무 뿌리 끝 부분에 붙어 사는 송이는 소나무로부터 탄수화물을 공급 받는 대신 땅속 무기양분을 흡수해 소나무에 일부를 공급하며 공생한다. 특히 태백산 자락의 마사토(화강암이 바람에 깎여 쌓인 흙)에서 자란 봉화송이는 수분이 적고 단단하며, 향이 강하다. 제철인 9월 말∼10월 중순엔 생송이를 맛보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 장기 보관할 때는 영하 50도 이하에서 급랭시킨다.
봉화까지 와서 송이돌솥밥을 지나칠 수는 없는 법. 많은 송이전문식당 중 봉성면 동양리의 한 밥집에 들어갔다. 돌솥밥 위에 가득한 송이들은 우선 시각과 후각으로 압도적 매력을 뽐낸다. ‘더하지 않아 빛나는’ 경북 음식의 대원칙은 송이밥에도 적용된다. 고추장 대신 소금간이 들어간 참기름을 약간만 넣어 쓱쓱 비비면 다른 반찬에는 손이 가지 않을 정도로 혀가 매료된다. 여기에 소주에 송이를 넣고 100일을 우려낸 송이술 한 잔만 곁들이면 무릉도원이나 진배없다. 정갈한 밑반찬들도 일품이다. 송이밥은 물론이고 반찬들도 원재료의 향을 간직하기 위해 마늘이나 파는 거의 쓰지 않는다. 특히 조선간장과 들기름으로 살짝 무친 무생채는 송이밥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한 교수는 “안동, 예천, 봉화 등 경북 북부지역은 ‘글공부를 하는 선비들의 성정을 흐리게 할 염려가 있다’ 하여 자극적이거나 지나친 포만감을 주는 음식을 피했다. 양념을 최대한 배제하고 가장 간단한 조리법으로 음식을 만들었던 게 오늘날까지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안동건진국시만 보더라도 그렇다. 은어를 건조시킨 뒤 살짝만 국물을 우려내는 방식은 전라도 지역의 빨간 은어매운탕과는 완전히 결을 달리한다. 타 지역에 비해 국수가 많이 발달한 것은 쌀농사를 지을 수 없는 지리적 환경의 영향이다.
퇴계 이황, 서애 유성룡, 농암 이현보 등 내로라하는 조선 문인을 대거 배출해 낸 곳. 이 고장의 강한 유교문화는 지역 음식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친 셈이다.
익어가는 곡주에 그리움 한 자락
“명년의 경삿날 알았거니(已識明年賀慶辰) 새해 맞아 무엇을 준비할까(欲營何事備迎新) 다만 초화주나 많이 빚어서(唯須力釀椒花酒) 자네와 몇 잔씩 들이켜리라(與子同傾數爵巡) -이규보, 동국이상국후집 제8권 고율시(古律詩) 제57수 ‘바로 붓을 들어 하 낭중의 화답에 차운하다’ 중에서
백운거사 이규보(1168∼1241)가 이처럼 노래한 것은 ‘초화주’가 고려 중기부터 이미 명주(名酒)로 이름났음을 짐작하게 한다. 초화주는 산초(山椒)와 여러 약재를 넣어 빚은 것으로, 정월 초하루에 차례를 지낸 뒤 새해를 축하하며 즐겼던 술이다. 그 맥을 잇고 있는 양조장이 경북 영양군 청기면의 영양장생주다. 임증호 대표(58)는 예천 임씨 31대손. 고려 중기의 문인 서하 임춘(이규보와 동시대 인물로 술을 의인화해 쓴 소설인 ‘국순전’의 저자)이 시조다. 조선 후기까지는 여러 문중에서 이 술을 빚었지만 일제강점기 이후 대부분 명맥이 끊겼다는 게 임 대표의 설명이다. 1970년대에 아버지로부터 양조장을 물려받은 그도 막걸리만 제조하다 1995년에야 초화주를 살려내기로 마음먹었다.
“아부지한테 전수받은 제조비법 그대로 맹글 수는 없었지요. 청국장 맛을 없애고, 태운 듯한 맛도 없앴뿌렸죠. 원료에서 인삼을 빼는 대신에 아카시아 꿀하고 다른 한약재를 넣었십니다. 옛날의 명곡을 지금 입맛에 맞도록 ‘편곡’한 셈이지요.”
재료 선택부터 누룩 빚는 법, 증류 방법까지도 모두 새롭게 연구해야 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양조장에서 일한 임 대표와 인근 양조장 집 딸이었던 부인 김문희 씨(55)의 뼈를 깎는 노력이 계속됐다. 1999년 드디어 결실을 보았다.
첫 증류가 끝난 초화주는 45도 안팎이지만 상품화되는 것은 41도와 30도 두 가지다. 독주임에도 쓰지 않고, 목 넘김이 좋아 마셔본 사람은 누구나 엄지손가락을 치켜든다. 특히 취기가 빨리 사라지고 다음 날 아침 숙취가 없는 게 특징. 예로부터 몸가짐에 조신한 문인들의 술로 사랑받아온 이유다.
예천군 용궁면의 용궁막걸리도 경북 북부에선 꼭 들러야 할 술도가다.
한 방송프로그램을 통해 유명세를 탔다지만, 이미 수백 년간 자리를 지켜온 유서 깊은 곳이다. 지금의 건물은 1950년대에 세워졌다. 겉은 담쟁이넝쿨에 뒤덮여 을씨년스러운 모습이지만 실내는 오래된 건물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깨끗했다. 연탄을 때는 발효실도 한 치 오차 없이 정확히 30도를 유지한다. 권순만 사장(63)은 초등학교 졸업 후 곧바로 이 양조장에서 일을 배웠고, 20년쯤 전 경영권을 사들였다. 평생을 막걸리와 함께한 인생이다.
“머 항상 팔리는 맨큼만 만들지요. 안 팔리믄 안 만들고, 누가 팔라 카면 그맨큼만 맹글어서 보내고. 양조장이 다 망해가고 있었는데, 요즘은 그래도 좀 나아요. 허허.”
부탁한 기억이 없는데 어느새 손마다 막걸리 잔이 들려 있다. 권 사장이 한 잔씩 막걸리를 돌리고 나더니 쭈뼛대며 굵은 소금을 내민다. 안주를 대접하지 못하니 소금이라도 한 톨 털어 넣으라는 거다. 예전에는 이렇게 소금을 안주 삼아 찍어 먹는 게 흔했다고 한다. 그마저도 없으면 침 한 번 삼키면 그만이었단다. 막걸리 한 잔 마시고, 소금 한 번 찍어 먹고. 괜찮은 궁합이고, 나름의 운치마저 느껴졌다.
P.S. 경북 북부지역의 음식문화는 이 지역 문화와 관련이 깊다. 그리고 그 문화는 지리적인 환경은 물론이고 선인들의 발자취와도 직결돼 있다. 이 지역의 ‘음식기행’을 떠나더라도 퇴계 이황(1501∼1570)이 말년에 사색을 즐기던 산책길, 서애 유성룡(1542∼1607)이 낙향해 징비록(懲毖錄·국보 132호)을 썼던 옥연정사, 청암 권동보(1517∼1591)가 안동 권씨 집성촌 입구에 지은 석천정사, 청량산 자락에 위치한 청량사 등을 놓쳐서는 안 되는 이유다.
예천·영양·봉화=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문권모 기자 mikem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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