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봄 다울라기리(히말라야에서 7번째로 높은 봉우리·해발고도 8167m). 세찬 눈보라가 갑자기 몰아쳤다. 몸이 쇳덩이를 짊어진 듯 무거웠다. 고글엔 눈이 달라붙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고글을 벗으니 앞은 보였지만 따가웠다. 살점이 뜯겨 나간 듯 얼굴이 아렸다. 신의 가호 없이는 한 발짝도 옮길 수 없다는 히말라야. 신이 또다시 변덕을 부렸다.정신을 가누기도 힘든 상황에서 대원들을 돌아볼 여유란 없었다. 앞만 보고 무겁게 발걸음만 옮겼다. 그러다 순간 멈춰 섰다. 기분이 꺼림칙했다. 본능에 맡겨 몸을 움직이는데 그 본능이란 놈이 귓가에 속삭였다. ‘잠깐 뒤를 돌아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후미에서 따라오던 영석이가 없었다. 대원들에게 소리쳤다. “영석이 어디 갔어?”》 “난 늙어 죽을 운명이야”
모두 어리둥절해했다. 한 대원이 울먹거리며 말했다. “방금 전까지 뒤에 있었는데….” 걱정할 겨를도 없었다. 일단 지나온 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몇 분이 며칠 같았던 순간. 얼마나 찾았을까. 사람 몸 하나 겨우 들어갈 정도의 크레바스(눈에 보이지 않는 빙하의 갈라진 틈)를 발견했다. 밑을 내려봤더니 영석이가 있었다. 10m쯤 아래 스노브리지(눈이 쌓여 다리처럼 만들어진 구조물)에 걸려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그 밑은 낭떠러지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암흑만이 입을 벌린….
로프를 내려 가까스로 끌어올리자 영석이의 첫마디가 이랬다. “어우, 내가 이것 때문에 살았네.” 그러고선 보여준 물건이 매트리스였다. 하루 전 내가 선물로 줬던 매트리스. 캠프에 두고 올 법도 했지만 영석이는 굳이 그 매트리스를 배낭에 걸치고 다녔다. 마음에 들어 두고 오기 싫었단다. 결국 그 매트리스가 스노브리지에 걸린 덕에 목숨을 구했다.
영석이는 매달려 있는 동안 펑펑 울었다고 했다. 갓 백일 지난 둘째 아들 성민이 얼굴이 아른거렸고, 그동안 살아온 과정이 파노라마처럼 머리를 스쳤다고 했다.
하지만 밖으로 나온 뒤엔 언제 그랬냐는 듯 툴툴 털고 일어났다. 걱정하는 표정으로 눈치만 살피던 우리를 오히려 안심시켰다. “난 늙어 죽을 운명”이라면서 특유의 유쾌한 농담 역시 잊지 않았다.
그는 그런 남자였다. 지나간 아픔 따윈 금세 털고 일어나는 천성적으로 낙천적인 사람(이런 말을 들으면 그는 “건망증이 심해서 그렇다”며 허허 웃곤 했다). 또 아닌 척하면서도 주변 사람부터 먼저 챙기는 진짜 사나이. 그가 바로 박영석이었다.
미식가, 그리고 그의 동태찌개
영석이와의 첫 만남은 1989년 겨울 네팔의 카트만두 시내에서였다. 나는 당시 ‘빌라 에베레스트’란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곳에 영석이가 왔다. 그는 직설적이었다. 선배 대접은 하되 하고 싶은 말은 거침없이 내뱉었다. 다소 건방져 보일 수도 있는 첫인상. 하지만 묘한 매력이 있었다. 말과 행동에 진심이 담겨서인지 믿음직스럽고 든든했다. 5분쯤 대화를 나눴을까. 직감적으로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이놈과는 오래가겠구나. 아니, 오래갔으면 좋겠다.’ 이날 밤 우린 밤새 술잔을 기울였다. 어깨를 걸고 노래도 부르며 시내를 누볐다. 선후배 사이에서 둘도 없는 형, 동생이 되기까지 하룻밤이면 충분했다.
한국에 온 뒤에도 우린 틈만 나면 어울렸다. 우연히 만난 경우라도 일단 얼굴을 봤다면 예감했다. ‘오늘 끝까지 가겠구나.’ 이런 내 표정을 읽은 영석이는 어김없이 “형, 오늘은 진짜 안돼”라면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결국 끝까지 갔다. 여러 사람이 어울려도 항상 술자리의 마지막엔 우리 둘만 남았다. 둘 다 애주가이기도 했지만 그냥 헤어지는 게 그렇게 아쉬웠다.
미식가인 영석이는 요리를 잘했다. 일단 어떤 재료라도 그의 손에 들어가면 작품이 나왔다. 술 마신 다음 날 그가 집에서 끓여준 해장국 한 그릇은 보약보다 든든했다.
다울라기리 원정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영석이는 “이번 원정에선 배고플 일이 없을 것”이라며 호언장담했다. 설명을 들으니 어이가 없었다. 동태랑 물오징어를 베이스캠프까지 가져가겠다는 게 아닌가. 신선도가 생명인 해산물을 대체 어떻게 운반하겠다는 생각인지.
하지만 그는 해냈다. 일단 카트만두에 도착하자마자 호텔 냉장고를 모두 가동해 해산물 박스를 넣었다. 이후엔 가장 빠른 짐꾼들을 고용해 베이스캠프까지 신속하게 운반했다.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뒤엔 얼음을 깬 구멍에 박스를 넣고 위에 눈을 덮었다. 계획은 치밀했고 과정은 완벽했다.
▼‘山사람’ 영석이가 그립다… 너의 동태찌개가 그립다▼
그 덕분에 대원들은 지칠 때면 어김없이 ‘박영석표’ 동태찌개를 맛볼 수 있었다. 양념장에 오징어, 사이다 등을 넣어 끓인 동태찌개는 얼마나 맛있던지. 내가 눈물을 그렁거리며 그 감동을 맛볼 때면 그는 넉살좋게 웃으며 묻곤 했다. “형, 맛있지?” 그땐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괜히 난 퉁명스럽게 말을 받았다. “배가 고프니 뭐든지 다 맛있지, 뭐.”
돌아오지 않는다. 그가 그립다
세상 사람들은 비교하길 좋아했다. 2000년대 초반 한창 히말라야 8000m 이상 봉우리 14개 완등을 놓고 우리가 경쟁할 때 라이벌 의식을 부추겼다. 일부 언론에선 ‘국내 최초’라는 타이틀에 눈이 멀어 우리 사이가 틀어졌다고 표현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우린 그냥 피식 웃었다. 산악에서 경쟁이란 죽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또 수도 없이 생사의 갈림길을 넘나들며 묵묵히 히말라야에 발자국을 남긴 서로를 존중하기에 누군가가 원정을 떠날 때면 견제는커녕 걱정이 앞섰다.
원정에 앞서 대화를 나눌 땐 한마디면 충분했다. “조심해라.” 서두르지 말고, 냉철하게 판단하고, 욕심내지 말고…. 이런 뜻이 모두 함축된 그 한마디는 어떤 격려보다 힘이 됐다.
사람들은 궁금해했다. 우리가 왜 목숨 걸고 산에 오르는지. 영석이와 나 역시 술을 마시다 가끔 이런 말을 주고받았다. “죽으려고 환장했나.” 산에서 죽을 고비에 직면하면 우린 신께 이렇게 빌었다. ‘이번에만 살려주세요. 다시는 산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않겠습니다.’ 그러다 위기를 넘기고 나면 우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베이스캠프가 아닌 정상을 향해.
우리가 신과의 약속을 밥 먹듯 어긴 이유는 간단했다. 힘들었기 때문이다.
사선(死線)에서 러시안 룰렛게임을 하듯 위기를 넘기며 한발 한발 내디디는 과정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최악의 상황을 극복하고 정상에 설 때면 기쁨은 둘째 치고 서러움이 복받쳐 올랐다. 이렇게 오르면 끝인데 신은 왜 그렇게 시련을 줬는지, 동료 목숨은 왜 앗아갔는지 울컥하는 심정에 마음으로 울었다.
그런데 산을 떠나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면 그 고통과 서러움이 그렇게 그리울 수 없었다. 그 고통과 서러움이 무료한 현실에 안주해 있는 나를 충동질했다. 그러다 시간이 좀 지나면 나도 모르게 묵묵히 짐을 싸는 내 모습을 발견하곤 했다. 아마 영석이도 같은 심정이었으리라.
그렇게 다시 한번 산에 간 ‘산사람’ 영석이가 오질 않는다. 당장이라도 “형, 이번엔 진짜 죽을 뻔했어”라면서 어디선가 내려올 것 같은데 소식이 없다. 48세인 그는 신장이 좋지 않았다. 이번 원정을 앞두고선 “그만하면 이제 충분하지 않으냐”고 만류했지만 그는 미소만 남긴 채 떠났다. 그러고선 돌아오질 않는다.
“산 사나이는 산에서 잠들어야 한다”고 말했던 영석이는 히말라야 어느 곳에서 잠들어 있으리라. 신의 곁에서 어느 때보다 벅찬 평화를 누리고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가 그립다. 그가 끓여준 동태찌개의 매콤한 향이 코에서 맴돈다. 영석아….
신진우 기자 niceshin@donga.com ■ 엄홍길은…
1960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났다. 2000년 세계 8번째, 아시아에선 처음으로 히말라야의 해발 8000m 이상 14좌를 완등했다. 현재는 ‘엄홍길 휴먼재단’을 설립해 그에게 도움을 준 현지인들에게 ‘나눔의 삶’을 실천하고 있다. 휴먼재단은 2009년부터 히말라야 오지 마을에 휴먼 초등학교를 세우고 있고,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한 의료 봉사 등의 활동도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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