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헌의 가인열전]<18>한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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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1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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씻김굿 보컬 흉내낼사람 ‘아무도 없소’

캐리커처 최남진 기자 namjin@donga.com
캐리커처 최남진 기자 namjin@donga.com
어느 누구도 복제할 수 없는 보컬 하나만으로도 예술을 넘어 접신의 경지에 오른 여성 대중음악가, 데뷔 이후 단 한 번도 차트의 톱을 차지한 적이 없지만 이 땅의 진지한 음악 수용자들로부터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지지를 한결같이 받아 온 한영애(사진). 그의 음악적 뿌리는 세계 대중음악의 근원인 블루스에 닿아 있다. 그는 블루스라는, 미시시피 삼각주의 단순하지만 깊은 슬픔의 울림에서 씻김굿의 몰아지경으로 승화시키는 원초적인 광란의 섬뜩함을 순식간에 포착해 낸다.

그의 최대 성공작인 ‘누구 없소?’와 ‘코뿔소’를 담은 1988년 2집의 황홀한 블루스와 록의 행간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나아가 그의 음악적 이력을 집대성한 1993년의 2장짜리 라이브 앨범 ‘아우성(我友聲)’(아마도 여성 보컬리스트의 것으로는 최고봉인)에서 유감없이 발휘된 다이내미즘을 만끽한 기억을 보존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비범한 탈속의 호흡으로 ‘목포의 눈물’과 ‘선창’ 같은 옛 노래들을 독창적으로 리메이크했던 ‘Behind Time’(2003)을 소중하게 듣고 또 들은 사람이라면 몇 장 되지 않는 조촐한 디스코그래피만을 가진 이 음악의 여사제가 우리 대중음악을 얼마나 풍요롭게 만들었는지 다시 한 번 상기하게 될 것이다.

한영애의 진가는 이정선과 이주호, 그리고 김영미와 함께한 4인조 혼성 포크 그룹 해바라기의 일원으로 모습을 드러냈던 1977년에 이미 증명되었다. 청년문화의 강제적 말살 직후 매너리즘으로 회귀하던 1970년대 후반의 암울함 속에서 그는 전무후무한 혼성 보컬 하모니의 일익이었을 뿐만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 그대로를’이나 ‘꽃신 속의 바다’ 같은 솔로 곡을 통해 양희은과 대척에 설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서의 가능성을 주지시켰다. 그러나 이 4인조의 역사적인 명반들은 시장에서 무시당했고 같은 시기에 발표한, 준비되지 않은 두 장의 솔로 앨범은 솔직하게 말해 없느니만 못했다. 한영애는 연극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극단 자유극장의 배우로 1983년까지 또 다른 무대 인생을 산다.

그러나 노래의 유혹은 운명처럼 그를 다시 스튜디오로 초대했다. 한영애의 본격적인 개화는 한국 대중음악의 2차 혁명기에 해당하는 1980년대 중후반 이른바 언더그라운드의 질풍노도기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졌다. 그는 송홍섭, 이정선, 조원익, 조동진, 김수철, 함춘호, 조동익 같은 베테랑 중 베테랑들의 지원 아래 하나의 앨범이 얼마나 절체절명의 것인지를 본능적으로 꿰뚫어 보았다.

이정선의 텍스트인 ‘건널 수 없는 강’과 ‘여울목’을 단숨에 명작의 지위로 올려놓은 1986년 벽두의 첫 솔로 앨범과 ‘누구 없소?’에서 ‘바라본다’까지 숨 막히는 긴장감이 팽팽하게 아로새겨져 있는 1988년의 두 번째 앨범에 이어 ‘조율’과 ‘말도 안돼’를 담은 1992년의 3집에 이르도록 그는 완전연소의 비등점에서 불타오를 때까지 침묵에게 소리를 양보하는 집요한 견인주의의 작은 성채를 쌓는다.

그가 이 맹장들의 공동체에서 함양할 수 있었던 중요한 미덕은 앨범에 대한 완전주의와 라이브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었다. 그는 그의 앞에 놓인 혁혁한 선배와 동료들과 더불어 풍족한 삶과 격렬한 환호 대신 평생 음악만을 사랑하고 또한 그것으로부터 고통받는 생활을 선택했다. 1995년 네 번째 앨범은 일관되게 견지해온 그와 같은 뮤지션십의 작은 선물이다.

이 앨범은 밖을 향한 자극적인 돌진이 아니라 내면을 향한 성숙한 성찰의 비망록이다. 배수연과 김민기라는 신구 세대를 각각 대표하는 베테랑 드러머들이 그윽하게 템포를 규정하는 가운데 선율부를 맡은 이병우와 신윤철 같은 기타리스트와 김광민과 정원영이 담당하는 피아노와 키보드는 화려한 명인기를 뽐내지 않고 달관의 호흡으로 소리의 배경을 하나씩 완성해 나간다. 그리하여 한영애는 ‘인생이란 나무를 바라보면서 새로운 오늘을 꿈꾸는 것’이며 ‘절망에서 무조건 달아나기엔 우리의 하루는 짧다는 것’이라는 인식에 도달하고 ‘불어 오라 바람아/내 너를 가슴에 안고/고통의 산맥 속에서 새 바람이 될지니’라는 고요한 후렴을 획득한다. 이 순간 모든 시간이 문득 정지했다. 그리고 음악은 가장 아름다운 소리인 침묵으로 이행했다.

강헌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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