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내 인생을 바꾼 책]제과 명장 김영모와 ‘행복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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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1월 12일 03시 00분


“최악을 개선하라” 절망의 삶 구한 희망의 문구

김영모 명장에게 빵은 과학이고 재료다. 끊임없이 배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김영모 과자점’ 도곡타워점 매장에서 그가 빵을 품에 안았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김영모 명장에게 빵은 과학이고 재료다. 끊임없이 배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김영모 과자점’ 도곡타워점 매장에서 그가 빵을 품에 안았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또 하루, 절망의 날이 저물었다. 홀로 남은 사무실에 멍하니 앉았다. 혹시 있을지 모를 부대 간부들의 비상 배차(配車)를 구실로 내무반 저녁 점호도 건너뛴 지 몇 개월. 펜글씨 솜씨가 좋다고 운 좋게 행정병으로 빠진 덕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일병 김영모의 마음은 항상 군문(軍門) 밖을 향했다.
‘제과점 동료들의 실력은 날로 늘겠지. 기술은 더욱 발전하겠지. 나는 도태되고 말겠지.’
실의에 젖은 그의 눈에 앞뒤 표지는 간데없고 너덜너덜해진 책이 들어왔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페이지를 넘기던 그가 순간 얼어붙었다.
그 한 대목. 얼마 뒤, 부대에는 “김 일병이 변했다”는 소문이 빠르게 돌았다.》
눈칫밥

1973년 6월 9일 군에 입대한 뒤 얼마 안 돼 김영모는 부대에서 독종으로 불렸다. 아니, 선임병들조차 그 앞에서는 함부로 “독종”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못했다. 당시 부대에서는 밤중에 고참들이 별 이유 없이 집합을 걸었다. 저탄고(貯炭庫)로 졸병들을 불러내서는 주먹다짐을 하기 일쑤였다. 김영모는 참지 않았다. 때리는 병장을 맞받아치다 몰매를 맞은 적도 여러 번. 그래도 덤볐다. 쉬는 날 외박을 나가 막걸리를 거나하게 마시고는 경례 안 한다고 한 소리 하는 타 부대 병장을 패기도 했다. 그렇게 악다구니를 하니 그를 건드리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때까지 내 삶이 그랬어요. 놀림 받고만 있으면 제대로 기 못 펴고 살았을 것 아니에요. 어렸을 때부터 나도 모르게 스스로 방어하고 사는 게 생존법칙처럼 돼버린 거죠.”

그렇게 살았다. 갓난쟁이 시절 부모가 이혼해 그는 전남 해남의 작은아버지 집에 동그마니 남겨졌다. 젖을 먹여가며 키운 사람은 이웃에 살던 고모였다. 이후 그는 작은아버지 집, 광주의 생부 집, 해남의 외가, 경북 왜관의 이모 집을 전전했다. 외가를 빼면 다른 친척 집들은 어렵사리 생계를 이어가는 형편이었다.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사촌들 틈바구니에서 그가 실컷 먹은 것은 눈칫밥이었다. 너무 일찍 세상을 알아버렸다.

해남에서 광주로 왔을 때는 “시골에서 왔다”고 도시 아이들이 조롱했다. 광주에서 왜관으로 갔을 때는 “억양이 이상하다”며 놀려댔다. 그냥 있다가는 내내 그렇게 살 것 같아서 상대방이 “알았다, 그만하자”고 할 때까지 싸움을 걸었다. 나중에 배 다른 그의 동생들은 “옛날에 형 정말 지독했다”고 혀를 내둘렀다.

16세,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를 그만뒀다. 왜 그만뒀냐고 하니 “눈칫밥 먹어 봤어요?” 하고 반문한다. 이모 집을 나와 무작정 대구로 나왔다. 그리고 영세한 제과점에 취직했다. 제과점에 딸린 빵 공장에서 먹여주고 재워줬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하다 보니 적성에 맞았다. “너, 재주 좀 있다”는 선배들의 말을 들었다.

그러나 돌봐 줄 사람 없는 사춘기 10대의 삶은 술과 담배, 그리고 싸움으로 점철됐다. 막걸리를 사발로 마시다 과음으로 손이 덜덜 떨리는 지경이 됐고, 하루 담배 두세 갑을 피워댔다. 술을 먹고 대로 한가운데를 소변을 보며 걷는 치기도 부렸고, 술 취한 사람과 일부러 어깨를 부딪치고는 싸움을 했다. 그래도 빵 만드는 기술은 부쩍 늘었다. 케이크에 버터크림으로 장미며 무늬를 짜내는 기술도 어깨너머로 익혔다. 그러나 아직 세상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행복론

김영모 일병이 전율하며 멈칫한 대목은 ‘걱정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제목의 장(章)이었다.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라. 최악의 경우를 그대로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하라. 최악의 경우를 개선하라.’ 단 세 문장이었다. 기차에 뛰어들어 자살하기 직전 모든 걸 포기하니 마음에 평안이 오고 불현듯 살아갈 방도가 떠오르더라는 글쓴이의 설명이 딸려 있었다. 그래, 사람에게 현실을 개선할 방책이 왜 없겠는가.

그때까지 그는 기회만 있으면 탈영하겠다고 마음먹었던 터였다. 입대할 즈음 그는 서울의 한 유명 제과점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직원 7명 중 부공장장을 맡고 있었다. 이제 스물한 살, 서울에 온 지 2년 된 촌놈으로서는 엄청난 자리였다. 대구에서 결핵에 걸려 일대 제과점 취업길이 막힌 고난을 겨우 벗어나, 이제야 빛이 저만치 보인다고 생각하던 무렵이었다. 그런 그에게 군 입대는 삶의 좌절이었다. 이제는 끝이라고만 생각했다.

“그 문장을 읽고 나니 ‘내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라는 생각이 퍼뜩 들어요. 그러면서 한동안 잊고 있던 성공이라는 단어가 다시 떠올랐어요.”

초등학교 6학년 시절, 그는 외가에 가면 생모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광주에서 사나흘 산길을 걸어 무작정 외가로 갔다. 이미 그의 형을 데리고 재가(再嫁)해 왜관에서 살던 어머니가 계실 리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왔다는 소식을 어찌어찌 들은 어머니가 왜관에서 왔다. “같이 살 수 없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어린 마음에 어머니만 만나면 모든 괴로움과 문제가 다 풀릴 줄 알았는데 물거품이 돼버렸다. 밤새도록 울다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말없이 떠나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문틈으로 지켜봤다. 나는 이제 혼자다. 후에 결핵을 앓을 때 요양하라며 자신을 절에 데려다주고 뒷바라지해 줌으로써 서운함을 사그라뜨린 어머니였지만 당시의 섭섭함은 컸다.

“그때 느꼈어요. 어머니와 같이 살 수 없다는 건 잘못된 거다. 성공이 뭔지는 몰랐지만 꼭 성공을 해서 내 힘으로 이 잘못된 걸 바로잡아야겠다.”

그렇게 가슴에 품었다가 질풍노도의 삶을 살며 잊어버렸던 성공이라는 단어를 다시 붙잡은 것이다. 제목도 모르는 그 책을 읽은 다음 날, 그는 술과 담배를 끊었다. 서울의 제과점 동료들에게 제과·제빵 관련 서적을 부쳐 달라고 부탁했다. 밤에 보초를 설 때는 싸리나무 가지를 꺾어 오른손에 쥐고, 왼손에는 동그란 자갈을 잡고 케이크에 무늬를 새기는 연습을 멈추지 않았다. 잔가지가 많이 달린 싸리나무 가지를 ‘짤주머니’(생크림, 당시는 버터크림이 끝의 구멍으로 빠져나오게 만든 주머니)처럼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200권 이상의 책을 읽었다. 이후는 독자가 아는 대로다. 그는 ‘김영모 과자점’을 만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책은 미국 작가 데일 카네기의 ‘행복론’이었다. 그 대목은 40년이 다 돼가는 지금도 김영모의 머릿속에 단단하게 새겨져 있다.

‘김영모’

그의 이름은 사실 김병무였다. 2003년 대한제과협회장을 할 때까지도 김병무라는 이름으로 공문을 지회에 내려보냈다. 그때마다 지방에서는 “회장이 바뀌었느냐”는 전화가 끊이지 않았다. 왜관 이모네서 중학교를 다닐 때 자기 자신을 그냥 영모라고 불렀고 그게 그냥 굳어졌다. 같은 동네에 살던 어머니와 형 병호에게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얼굴도 닮은 데다 이름까지 비슷한 남자애가 있다는 게 알려지면 혹시나 어머니가 개가한 시댁에서 숨겨놓은 아들이 있다는 걸 알까봐 그랬다. 이제 모두 추억이 됐다.

58세의 김영모는 제과 명장(明匠)이다. 각종 기능 명장들의 모임인 대한민국명장회 10대 회장으로 기능인들의 숙원인 ‘기능인 회관’ 건립을 위해 뛰고 있다. 예산 부처의 지원이 간절하다. 그러다 보니 빵 만들 때 입는 모자, 가운, 앞치마보다는 양복을 입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는 빵에서 멀어진 걸까. “아이구, 제과 명장이 빵 안 만들면 뭐 하겠습니까.” 껄껄 웃는다. 영락없이 맛있는 빵집 주인이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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